장오성 교무
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티벳 어느 절엔 얼굴이 거대한 눈 하나만으로 된 괴이한 불상이 있다. 온 우주 허공 법계가 다 보고 다 알고 있으니 진리의 위력을 거대한 눈으로 표현한 것이다.

주변에 보면 머리가 참 좋은 사람들이 있다. 기억력이 꽝이라 금방 들은 것도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몇 시간 실컷 이야기를 나누고도 다시 만나면 기억을 못하는 내겐 경외의 대상이다. 기억력과 판단력이 탁월한 이들이 아는 세계는 대체 어느 정도일까. 부러우면 지는 건데, 심히 부럽다. 

인간의 인식은 제아무리 많이 알고 최고의 지능을 가졌어도 유한하며 극미하다. 무엇에다 어떤 이름 하나 붙여놓고 그걸 다 안다고 하는 딱 그 정도 수준이다. 여기 꽃 한 송이를 보여주며 ‘이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물으면 자신 있게 ‘장미’라고 답한다. 그 이름과 모양, 생태 등을 안다 해서 그 존재를 진정으로 아는 것인가. 세상 모든 사전을 외운 사람도 개미 한 마리조차 그 실상을 다 알 순 없다. 우리는 그 무엇도 실상 그 자체를 알 수 없다. 중생들의 아는 것은 한정된 지식이나 주견일 뿐, 그 실상 자체는 불가사량이며 불가지다.

치매가 심한 이는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나 상황을 인식 못하니 인과가 발생하지 않는 것 아닐까. 천만의 말씀. 당사자의 기억이나 인식 너머 훤히 보고 알아 정확히 다 되갚는 전지전능한 힘이 있다는 사실! 완전무결하여 오류 없이 다 보고 다 아는 진리, 공적영지심이 있다. 
 

일체 존재의 나타남 자체가
나의 모습이며 
일체의 작용 또한
나의 위력이다.

텅 빈 허공은 일체를 다 보고 아는 자다. 텅 빈 우주에 가득한 진리CCTV와 진리계산기는 쉼 없이 다 지켜보고 다 알아서 호리도 착오 없이 계산한다. 혼자만의 은밀한 마음 움직임이나 행위도, 모든 관계 속에서 일어난 일도 찰나 간에 계산이 끝나 정확히 현실로 드러내 준다. 이것이 소위 인과다. 세간에서 사용되는 인과에 대한 개념은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로 오염되어 있기에 묘유, 혹은 작용과 드러남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중립적이다. 

진리는 일체를 작용한 대로 드러내 준다. 일체의 드러남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니며, 그러하게 했으니 그러하게 드러난 것이고, 시절인연 따라 때가 되면 계속 드러날 것이다. 털끝만큼도 더하거나 빼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지극히 밝고 지극히 정성하고 또한 지극히 공정하여 어느 찰나도 쉼 없이 보고 계산해 드러내며, 누구라고 더 예뻐하지도 미워하지도 않고 작용한 그대로만 척척 무심히 드러낸다. 진리에는 뇌물도 권력도 통하지 않는다. 

일원이며 법신불이며 신이며 진리이며 성품인 나는 만능만지 전지전능한 어떤 위력이다. 모든 능력, 만능을 갖추고 있는 나는, 태어나게 할 수도, 자라게 할 수도, 죽게 할 수도, 색과 향과 모양을 낼 수도, 보고 호흡하고 듣고 걷고 씹고 맛보고 소화 시키고 웃고 울고 생각하고 화내고 인식하고 잠자고 깨고 날고 기고 싹틔우고 열매 열고 눈비 오고 바람 불리고 성주괴공 생로병사 춘하추동 생주이멸 일체의 작용과 드러냄을 다 하고 있다. 

나는 무소부재하며 전지전능하니, 일체 존재의 나타남 자체가 나의 모습이며 일체의 작용 또한 나의 위력이다. 인과는 작용한 대로 드러내 주는 묘유며, 다 보고 다 알아서 다 보응하는 나의 역량이고 또한 동시에 일체 우주만물의 역량이기도 하다. 어느 곳 어떤 것도 전지전능한 위력을 지닌 부처님 아님이 없으니 개미 한 마린들 함부로 대할 일이 아니다.

나는 허공 가득한 눈 없는 눈이라 다보고 다 알아서 다 보응하니 세상천지 숨을 곳도, 누굴 향해 억울하다 항변하고 하소연할 것도 없다. 온 천지에 오직 나 하나뿐이니 말이다.

/변산원광선원

[2023년 4월 19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