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108년 대각개교절을 맞이해 소태산 대종사가 다녀간 일부 교당의 역사와 교도들의 축하 메시지를 전한다.

하단교당
하단교당

하단교당, 영남권 최초의 교당 

원불교 부산 교화의 시원(始元)은 원기15년(1930) 봄, 장적조 선진이 수양아들 이덕환을 입교시키면서 시작됐다. 소태산 대종사는 원기16년(1931) 부산을 방문했고, 원기17년(1932) 김기천 교무가 파견돼 본격 교화가 시작됐다. 

소태산 대종사의 부산 방문 기록은 총 10차례에 이른다. 소태산 대종사와 조송광 선진이 부산에서 10여 일간 체류하는 동안 9월 24일에 7명, 25일에 5명, 27일에 6명, 29일에 19명이 입회했다.  장적조 선진이 원기15년(1930) 부산에서 순교할 때부터 이때까지 입회 회원 수가 총 80명이 되었다.

양 처사(양원국 선진)과 원기16년(1931) 여름에 장적조 선진의 만남이 이뤄진다. 양원국 선진과의 만남 이후 소태산 대종사와 조송광 선진은 부산 회원 10여 명과 함께 자동차로 동래온천에 가서 온천욕을 한 뒤 금정산 범어사를 구경하고 돌아왔다. 이튿날은 몇몇 부산 회원과 양산 통도사를 찾아 구경하고 점심을 공양했다. 통도사 구경을 마치고 나와 부산 회원의 친척 집에서 차 대접을 받았으며, 부산 회원들은 부산으로 돌아가고 소태산 대종사와 조송광 선진은 함께 경주로 출발했다.

부산 하단교당 설립 이후, 남부민교당(현 부산교당)과 초량교당이 설립돼 영남권에 원불교가 전해지게 된다. 소태산 대종사가 다녀간 성적지이자, 영남권 최초의 교당이자 문열이 교당으로서의 역사가 빛나는 하단성적지는 전국의 재가출가 교도들이 성지순례를 온다. 

현재 하단교당은 성적지 수호와 함께 월요일 원광 아카데미, 수요 선방, 음악 연습 공간 등 열린 교당으로서 지역 교화에 힘쓰고 있다.
 

신흥교당
신흥교당

신흥교당, ‘신천출장소’란 간판으로 첫 교화의 장 
신흥교당은 소태산 대종사의 구인제자인 이재철 종사와 그의 팔촌인 이동안 대봉도의 고향으로, 원불교 전무출신 배출의 온상이자 교단의 창립·발전에 함께 공헌해 온 초기 교단의 산실이다.

이동안 교무는 고향에 교당 창설을 염원했지만, 시기상조라는 소태산 대종사의 말씀을 받들어 어려운 마을 사람들의 의식계몽을 도모하는 ‘묘량수신조합’을 구성했다. 이로 인해 경제적 윤택을 가져왔고 이 자금으로 본관 1동과 행랑 1채를 건립해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불법연구회 승인을 얻어 원기12년(1927) 묘량수신조합을 정리, 불법연구회에 편입하고 예회실을 건축해 ‘신천출장소’라는 간판을 걸었다. 이것이 첫 교화의 장이 된다. 

신흥교당에 소태산 대종사의 첫 번째 방문은 원기14년(1929) 9월 21일이다. 당시 소태산 대종사는 마흔을 넘은 나이에 몸이 부대하여 산을 넘어 올 때 뒤에서 밀어야 하기도 했다. 이흥에 석탑이 있다는 말을 듣고 수행원들과 같이 절터를 둘러보고 “여기가 수양 터로 쓰겠다”고 말했다.

첫 번째 방문으로부터 5년 후 소태산 대종사의 두 번째 방문(원기19년(1934) 11월 말)과 세 번째 방문(원기23년(1938) 가을)이 이뤄진다. 소태산 대종사는 솔개재로 예상보다 일찍 넘어왔다. 신흥교당의 김홍철 초대 교무가 두루마기를 입고 맞이했다. 
김홍철 교무는 스물아홉의 나이(원기16년)에 출가해서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신흥 교무로 가라는 명을 받들어 오게 된 인물이다. 
 

좌포교당
좌포교당

좌포교당. 대산종사 비롯해 많은 출가자 배출 
소태산 대종사는 좌포에 두 번 다녀갔다. 102년 전 겨울에 한 번, 100년 전 만덕산 초선회가 열리던 때 또 한 번. 이때 두 밤을 대산종사 탄생가에서 묵고 갔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좌포교당은 대산종사를 비롯해 많은 출가자가 배출되고 전무출신 권장부인 정토들의 산실이 됐다. 

좌포교당은 현재 대산종사 탄생가 수호와 함께 사십년 째 운영 중인 어린이집을 비롯해서 칠 년 전부터는 노인일자리사업을 담당하며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하는 토탈 교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부는 동굴과 1분 이상 발 담그기 힘들다는 풍혈냉천도 지척에 두고 있다. 섬진강 상류 오원천이 흐르는 봉황산 아래 물길이 좌우로 돌아드는 좌포로 올 여름 차박하러 한 번 들러보자.
 

용신교당
용신교당

용신교당, 소태산 대종사 두 번 왕림 

용신교당은 원기17년(1932) 방준용·박병원·황성모 교도 등이 당시 원평지부 예회 참석을 시작으로, 30여 명이 입교하자 원기19년(1934) 방준용 교도 사택을 빌려 박대완 교무의 출장법회로 시작됐다. 원기21년(1936)에 교당요인들의 공동출역으로 당시 원평지부 김광선 교무의 감독하에 교당 신축기공을 하고 대판(오사카)에 주재하던 박대완 교무가 초대교무로 부임해 중흥기를 이뤘다. 

원기22년(1937) 3월 불단에 일원상을 봉안하고 봉불식을 한 바, 소태산 대종사가 친히 왔으니 이는 실로 의미가 크다. 원기20년(1935) 회상 최초로 중앙총부 대각전에 일원상을 봉안한 후 지방에서도 이뤄진 것이다. 초량교당, 영산 대각전, 신흥교당에 이어 용신교당, 원평교당에 일원상 봉안을 한 것이다.

원기23년(1938) 소태산 대종사는 칠보수력발전소를 행가할 때도 용신교당에 방문했다. 재가출가 교도(이공주, 송도성, 송혜원, 박대완, 용신주무: 이화진, 김정기(현준))등이 모시고 정신문명의 상징인 동학혁명 유적지, 김개남 장군 등 주동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산외·칠보·산내, 섬진강댐, 칠보수력발전소를 둘러보며 물질에 대한 정신개벽의 법문을 받들었다. 

이처럼 용신교당은 소태산 대종사가 두 번 왕림해 경륜의 큰 족적을 나툰 역사를 갖고 있다. 또 소태산 대종사가 재가출가 인재양성을 염원하며 친히 부촉했던 유서깊은 도량이다.
 

초량교당
초량교당

초량교당, 1주일간 직접 교리 강습

소태산 대종사가 남부민출장소(현 부산교당) 신축기념식에 이공주와 신영기를 대동하고 참석했다가 총부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부산역에 당도해보니 기차가 막 출발한 뒤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다음 차를 타기로 하고 김성명화에게 말했다.

“성명화, 정혜네 집에 가서 기다리는 것이 어떨까?” 김성명화의 딸 이정혜는 초량에서 살고 있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정혜의 집에서 이삼중행, 이영우, 김필연 등을 만났다. “나는 부처님의 법을 전하는 사람이다”로 시작하는 소태산 대종사의 법문을 받든 이들은 모두 소태산 대종사의 제자가 되기로 했다.

다음날 소태산 대종사는 기차에 오르면서 “내가 지금까지 어디를 가던지 기차시간에 늦어본 일이 없었다. 어제는 아마 그대들 같은 훌륭한 제자들을 얻으려고 그렇게 늦었나 보다. 그대들은 모두 진리가 우리 회상에 보낸 큰 인물들이니 마음공부 잘해서 큰 일꾼이 되기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이후 이들은 남부민출장소의 김영신 교무를 초청해 각자의 집에서 돌아가며 출장 법회를 보기 시작했다. 이것이 초량교당 창설의 시초가 됐다.

원기21년(1936), 소태산 대종사는 초량 사립학교에서 1주일간 교리 강습을 했다. 김제준은 초량사립학교 교장으로서 소태산 대종사를 모시고 초량교당 창설에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줬다. 회관 건축에도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줬다.
 

남원교당
남원교당

남원교당, 소태산 모시고 봉불식 

남원교당은 원기23년(1938) 3월 20일 박장식 종사의 모친 정형섭의 회갑 기념으로 남원읍 향교리(향교동 564·교촌길14)에 4칸 기와집을 신축하고 출장소 간판을 붙였다. 초대 교무로는 정관음행 교무가 부임했다. 

원기24년(1939)에는 향교동 출장소가 교도 수의 증가로 협소해져 남원읍 내 중심부 동충동에 대지 600평을 매입, 14칸 가옥을 착공해 12월 준공했다. 이에 따라 남원출장소는 지부로 승격, 원기25년(1940) 3월 23일 소태산 대종사가 참석한 가운데 봉불낙성식을 거행했다.

불법연구회 〈회보〉 65호 남원지부 소식란에서 이때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종사주(소태산 대종사)께서는 3월 22일 오전 11시 30분 남원역에 하차하시와 지부장 이하 수십 명의 환영 속에서 자동차로 신축 교당(남원지부)으로 향하사 남원토산(土産·그 지방에서 특유하게 나는 물건)의 진선(珍膳· 진귀하고 맛이 좋은 음식) 공양이 있었고, 이어서 거룩하신 법설로써 일반회원은 법공양을 받들고 익일 정오에는 지방 유림 제씨와 주지승 등 다수 인사가 내방하여 법설을 들었다.’ 

‘다같이 다함께!’ 올해 대각의 달을 맞아 남원교당은 경산상사를 모시고 4월 16일 대법회로 힘을 모았다. 4월 28일에는 ‘은혜의 쌀 나누기’ 행사와 ‘대각 떡 나누기’를 진행할 예정이다.

“원기108년 대각개교절 우리의 공동생일을 축하합니다.”
 

마령교당
마령교당

마령교당, 많은 법기 어린 곳 

소태산 대종사가 대각을 이루고 원기9년(1924) 만덕산에서 초선을 나며 최도화 대봉도의 인도로 마령에서 전음광, 송혜환, 오재중 등 인연들을 만났다. 마령지역에서 일원대도 정법의 법종자가 뿌려진 후 원기14년(1929)에는 소태산 대종사가 직접 마령교당에 방문해 일주일 동안 머물면서 많은 법연들을 만났다. 

소태산 대종사는 “마령지역에는 많은 법기가 어려 있다”고 말했고, 현재까지 많은 전무출신과 마령출신 재가 법동지들이 전국 곳곳에서 주인이 되어 공부와 사업을 하고 있다.

마령교당은 내년이면 100주년을 맞이한다. 4월 9일에 대각전 개축과 소법당·생활관 신축으로 100주년을 준비하고 있다. 5대 교무였던 송벽조 교무가 마령교당에 임직할 때 일제의 수탈이 극심해지는 가운데, 30년 만의 큰 가뭄이 들어 민심이 흉흉했다. 송 교무는 일본 천황에게 투서를 했고, 그 사건으로 인해 소태산 대종사가 일경으로 하여금 고초를 겪게 된 기연의 장소이기도 하다.(〈대종경〉실시품 10장의 법문)

현재 인구가 감소하고 노령화돼 젊은 층이 많지 않지만, 마령교당 교도들은 소태산 대종사의 말씀이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정성을 다해 젊은 층과의 유대를 강화하며 다시 한번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 정성을 다하고 있다. 

원기108년 대각의 달을 맞이해 일원의 법음과 함성이 시방세계에 울려 퍼져서 일체중생이 제도의 은혜를 입고 무등등한 대각도인과 무상행의 대봉공인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원한다. 

사진·글 협조=하단·신흥·용신·초량·좌포·마령·남원교당

[2023년 4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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