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소태산 대종사는 어린 시절 하늘과 자연현상 등에 궁금증이 많았다. 그래서 7세 때 ‘하늘의 구름을 높은 곳에 올라가면 만져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옥녀봉에 올라갔다. 하지만 구름은 옥녀봉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있었고, 궁금증은 더 커지기만 했다. 

이 예화의 배경을 보면 탄생가가 옥녀봉 아래에 위치해, 어린 소태산의 눈에는 집 앞의 옥녀봉이 대단히 높아 보였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그 어린 나이에는 구름이 마치 옥녀봉에 걸려있는 듯했을 것이다. 그래서 구름을 한번 잡아보고자 했던 어릴 적 소태산 대종사의 마음에서부터 큰 구도심이 싹트게 됨을 알 수 있다.

영산성지 탄생가는 이렇듯 소태산 대종사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1905년경까지 이곳에서 살다가 구호마을로 이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탄생가는 한국전쟁 당시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터에 칠산 유건이 집을 옮겨 짓고 살았으며, 원기42년(1957) 중앙총부 중앙수양원으로 옮겨 만년 수양에 힘쓰자 원기44년(1959) 교단에서 인수해 철거하고 집터만 보존해왔다.

원기64년(1979) 7월 사적관리위원회는 성탄지복원 문제 공론화를 진행해 원기65년(1980) 8월 사적및유물관리위원회가 성탄지 복원문제를 논의했다. 당시 탄생가 복원에 대한 의견으로 ‘초가의 원형태로 복원하되 기와로도 보수할 수 있도록 한다’고 의견을 모아 영산성지사업회가 복원 기공을 시작했다. 이후 동년 9월 상량식 기념법회를 열었고, 원기66년(1981) 소태산 대종사 탄생가를 복원했다.

원기101년(2016) 8월 문화재관리위원회에서는 ‘성보 제1호 소태산 대종사 탄생가 보수의 관한 건’이 안건으로 발의됐다. 오래된 탄생가를 보수해야 하는 시점에서 새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이 의견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원래 탄생가는 초가 형태의 주택이었으나, 원기65년(1980) 사적및유물관리위원회에서 기와로도 보수할 수 있도록 한다고 논의함에 따라 초가집이 아닌 기와집의 구조에 초가를 올렸다는 것이다. 때문에 당시 소태산 대종사가 생활했던 초가 형태의 집으로 재복원이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이 모아진 것이다.

원형복원은 말 그대로 당시의 원형에 대한 정보가 분명해야 한다. 하지만 탄생가 원형에 대한 정보는 지붕만 드러나 있는 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 그래서 당시 그 지역 일대의 초가집 형태를 조사해 보고 또한 전문가들의 자문을 얻어 진행하기로 결의했다.

원기104년(2019) 4월 새로 탄생가 복원을 마치고 준공 봉고식이 열렸다. 탄생가 복원 후에는 두 가지 여론이 있었다. “고증이 어려운 현실에서 다시 복원을 거쳐 탄생가 수리를 마쳐 다행이다”와 “또 다시 초가집이 아닌 기와집을 짓고 지붕만 초가를 얹었다. 완벽한 원형복원이 어렵더라도 근접하게는 해야 하지 않았냐”는 의견이었다.

[2023년 4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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