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제명바위는 영산성지 옥녀봉 하단, 정관평을 바라보는 자리에 위치한 자연석 바위로, 방언공사 후 조합원의 이름을 새긴 바위다. 소태산 대종사와 구인선진이 방언공사 완공을 기념하기 위해 새긴 것으로, 당시 비석 하나 세울 경제력이 안되던 선진들이 바위에 시멘트를 바르고 팔인 단원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소태산 대종사가 대각 후 제일 먼저 시작한 사업이 정관평 방언공사다. 길룡리 앞 바닷물이 드나드는 간석지(干潟地)에 언(堰)을 막아 논을 만드는 방대한 작업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방언공사를 위한 준비로 저축조합운동을 시작했는데, 저축조합운동은 금주단연과 근검저축을 시행하고, 공동출역으로 조합자산을 마련했다. 이렇게 모아진 자산 2백원에 이웃 마을 부호로부터 4백원의 빚을 얻고, 소태산 대종사의 사제를 팔아 4백원을 마련해 1천원의 자금이 준비됐다. 

이렇게 모인 자금으로 당시에 숯을 사두었는데, 일 년 만에 숯값이 10배로 급등하면서 큰 자금으로 불어났다. 덕분에 이웃 부호에게 빚을 갚고도 방언공사에 소요되는 큰 자금을 감당할 수 있었다.
 

방언공사 당시 소태산 대종사가 “저 사람들이 나를 찾아온 것은 도덕을 배우기 위함이어늘, 나는 무슨 뜻으로 도덕은 가르치지 아니하고 이같이 먼저 언을 막으라 하였는지 그 뜻을 알겠는가” 하며 이춘풍에게 한 법문이 〈대종경〉 서품 10장에 잘 나타나 있다. 
언을 막아 농토로 만드는 간척사업을 원기3년(1918) 4월에 착공, 원기4년(1919) 3월 2만6천여 평의 간척답을 준공했다. 별다른 장비 없이 바다를 막고 나니 조합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기념비를 세우자는 의견을 냈다. 조합원 모두 동의는 했으나 비용이 없었다. 이때 칠산 유건이 옥녀봉 기슭의 바위를 가리키며 “저 바위에 양회(시멘트)를 바르고 거기에 제명을 해 두면 백년은 갈 것 아니냐”고 제안해 채택됐다. 

정관평이 내려다보이는 옥녀봉 중턱 3m 가량의 높이 자연석 바위에 시멘트를 가로 90㎝, 세로 45㎝로 판처럼 바른 후 간척사업의 시(始)와 종(終), 설시원(設始員)의 제명(題名)을 팔산 김광선이 한문으로 오른쪽에서부터 세로글씨로 음각했다. 정관평 기념비인 일명 ‘제명바위’의 설시원 이름에는 조합장 외 8인의 이름을 나이순으로 새겼으며, 이때 8인의 이름은 법명이 나오기 전이라 본명으로 새겨졌다. 정관평 제명바위는 원불교 최초 금석문이며, 가장 오래된 기록문으로 창립정신의 상징이 됐다. 

현재 제명바위는 오랜 시일이 흐르면서 풍파에 파손 위험이 있다. 일부에서는 ‘보존이 어려우면 그대로 금석문을 떼어 박물관에 보관하자’고 하지만 일부에서는 ‘그대로 보존치 못하고 떼어내는 것은 아마추어적 발상이다’고 말한다. 때문에 이렇다 할 방책 없이 지금도 풍파에 노출돼 있는 실정이다. 중요한 것은 그냥 이대로 계속 둔다면 언젠가는 파손된다는 점이다. 제대로 현장에 보존할 방안을 제시하거나, 정말 어렵다면 떼서 보관하는 방안이라도 나와야 할 상황이라 판단된다.

[2023년 4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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