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성 교무
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나타나 나를 구해주었다면 평생 그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며 살 것이다. 누군가 불난 집에서 나를 구해주었다거나, 위급한 순간에 심폐소생술로 살려냈다면 잊지 못할 은인으로 큰 감사를 표하며 보은할 길을 찾을 것이다.

우리가 보통 아는 생명의 은인, 혹은 절대적 은혜란 그렇게 드라마틱한 상황에서 생명을 구하거나 살려주는 이다. 하지만 내 생명을 살린 은인을 이처럼 극단적 상황에서 일어나는 것으로만 설정하는 것은 미성숙한 이들의 견해다. 마치 아이들이 매일같이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며 노심초사하는 부모의 은혜는 당연해서 보이지 않고, 어쩌다 한번 와서 멋진 장난감이나 유명브랜드 신발을 안겨주며 잠깐 재밌게 놀아주는 이모의 은혜가 제일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은 수준이다. 

매 순간 존재하는 은혜, 생명과 직결돼 있는 참 은혜는 눈 밝고 성숙한 이가 아니면 거의 다 알아차리지 못한다. 진정한 생명의 은인, 이것 없으면 내가 죽었을, 절대적 은혜를 느껴 보라! 지금 숨 쉴 공기가 없다면 살 수 있겠는가. 발 디딜 땅이 없다면, 영원히 해가 뜨지 않는다면, 물이 없다면 살 수 있을까. 낳아 길러주지 않았다면, 이 천지에 의지할 무엇 하나 없이 나 하나뿐이라면, 무법천지라면 나는 결코 살 수 없다. 이들이 없이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면 그것이 바로 내 생명의 은인 아니겠는가. 천지·부모·동포·법률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살 수도 내가 존재할 수도 없으니, 그 사은 전체가 곧 나며, 내 생명의 은인이다. 
 

온 우주는
서로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
한 몸으로 얽혀 운행한다.

허공법계 우주만물 모든 것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한 몸이다. 이것 없으면 저것이 없는 하나의 유기체, 한 몸, 법신불, 일원, 성품, 본원이다. 나는 어디까지라고 선을 그을 수 없다. 우주만물 허공법계 일체가 곧 나며, 이들이 없어서는 한시도 살 수 없으니 일체가 한 몸으로 내 생명의 은인이다. 죽을 것 같은 드라마틱한 상황에서 나를 구해주는 것만이 생명의 은인이 아니라는 말씀. 

이럴 때는 감사하고 아닐 때는 원망해도 되며, 이런 이는 필요하고 저런 이는 아니라고 상대적으로 은혜를 설정하고 산다면, 그 변덕을 어찌 다 맞추겠는가. 혹 꼴 보기 싫고 없어져야 하며 절대로 저것은 부처일 수가 없고, 나여서는 더더욱 안 된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있는가. 상대방 관점에서 나도 누군가에겐 그런 존재일 수 있다는 건 왜 가정하지 않는 것인가. 

꼴 보기 싫은 이도 그에겐 그게 최선이며, 누군가에겐 가장 귀하다. 가장 더럽게 여기는 것도 어떤 존재에게는 먹이가 되며, 이것과 저것이 서로 의지하며 돌고 돌다 보면 일체가 없어서는 안 되는 은혜의 관계로 얽힌 한 몸을 이룬다. 온 우주는 서로 없어서는 못 사는 한 몸으로 얽혀 운행되니 나 아닌 것, 생명의 은인 아닌 것이 없다! 

일체를 나와 너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다차원의 한 몸, 보이지 않는 하나의 관계망을 보는 것이 지혜며 깨달음이며 괴로움을 벗어나는 길이다. 참 은혜는 절대 자리에 머물러야 나타나니 절대 자리를 깨달은 이가 아니라면 사은신앙을 할 수 없다. 없어서는 살 수 없는 나임을 아는 까닭에 동체대비심이 나오며, 이것이 참 신앙, 참 불공, 참 보은이다. 

온통 은혜의 바다에 살면서 불평불만으로 구시렁거릴 시간 있으면 단 1분만 코를 막고 숨을 참아보시라. 매 순간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생명의 은인들 천지인데 정녕 죽다 살아나는 드라마틱한 상황을 겪고서야 은혜를 발견하고 싶은 건가?

/변산원광선원

[2023년 6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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