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성 교무
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도인은 일이 없다는데요~.” 이곳 선원에 일이 많은 것을 보고 어느 교도님이 무심결에 툭 내뱉은 말이다. 하루 종일 일없이 거니는 이를 도인이라 믿는 모양이다. 어디서 들은 법문을 본의도 모르고 일부만 똑 떼어 신념으로 삼으니 이거 참 큰일이다. 호탕하게 한참을 웃은 후 본뜻을 일러드리긴 했으나 알아들었을지는 의문이다.

시체가 아닌 이상 어찌 일이 없겠는가. 잠자는 것도 육근을 움직이는 일이요, 먹는 것도 웃는 것도 일체가 일 아님이 없다. 그렇다면 ‘도인은 일이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산골 생활이 다 그렇듯 요즘 선원엔 일투성이다. 구석구석 끝없이 손보고 다듬으니 매일 사는 이의 눈에도 낙원인데 어쩌다 오는 이들이야 감탄해 마지 아니하며 ‘무슨 복으로 이런 극락에 사느냐’고 부러워한다. 어떤 이는 가만히 있어도 늘 이 상태가 저절로 유지되는 줄 알고 오직 찬탄하기 바쁘고, 어떤 이는 이렇게 잘 관리하려면 얼마나 고생이 많겠냐며 안쓰러운 눈빛으로 격려를 보낸다. 전자는 철없는 낭만주의자이고 후자는 각박한 현실주의자다. 

도인의 삶은 낭만주의도 현실주의도 아닌 매사가 수행일 뿐이다. 마음공부, 선, 수행은 어느 때라고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동하거나 정하거나 본원자리, 자성을 돌이켜 그 자리에 딱 걸어두고 육근을 작동시키는 것이 수행이다. 모름지기 수행이란 일체 처, 일체 시에 자성을 떠나는가 아닌가, 진공으로 체를 삼고 묘유로 용을 삼는 것이 유지되는가 아닌가에 달려있다. 일 더미 속에 살면서도 좋다 싫다는 분별없이 육근을 작용시키면 일체가 수행 아님이 없고, 보은행 아님이 없고, 실력증진의 시간 아님이 없다. 
 

육근의 모든 움직임이
자성을 떠나지 않는 수행일 뿐,
매일 일 더미 속에 살아도
일이 없고 오직 수행만 있다.

딴 생각 않고 그 일에만 집중한다 해서 수행하는 것도 아니요, 그게 무시선은 더더욱 아니다. 성품을 깨닫지 못한 이가 몇 시간 방석에 몸을 앉혀 놓았다고 수행하는 것도 아니다. 자성을 깨달은 후, 앉으나 서나 누우나 자성자리에 충전기가 꽂혀 있는 것이 참 수행이다.

참 도인은 자성을 깨달은 이후, 육근을 작용하는 모든 움직임에 자성을 떠나지 않으니 일체의 일이 노동이 아니라 수행이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먹고 자고 생각하는 육근의 모든 움직임이 자성을 떠나지 않는 수행일 뿐, 도인은 따로 일이 없다. 동정 간에 선, 일심을 떠나지 않아 보보일체가 대성경이다. 

진공에 플러그를 꽂은 그대로 육근을 사용하는 것이 무시선이며 참 수행이다. 전체자리에서 분리되어 나오지 않고 법신에 머물며 육근을 작용하면 움직이되 움직임 없이 충전과 동시에 에너지를 활용하는 시간이 된다. 하루 종일 온몸이 땀에 젖도록 강도 높은 노동을 하더라도 자성을 떠나지 않으면 노동이 아니라 수행이다. 매일 일 더미 속에 살아도 일이 없고 오직 수행만 있다. 도인은 따로 일이랄 것도 따로 수행이랄 것도 없다. ‘도인은 일이 없다’는 이 금옥 같은 법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믿으니 법문이 세상 나와 참 고생이 많다. 

좌선이든 청소든 매사에 임할 때 하기 싫은데 마지못해 하거나 남의 일 해주는 양 속으로라도 투덜댄다면 일생을 노동자로만 사는 것이요, 종일 힘을 써 육근을 움직이되 보은과 수행으로 삼아 마음이 여여하고 한가로운 이는 수행자다. 겉으로 보기엔 똑같은 일이 노동자에겐 힘든 노동이나 수행자에겐 힘이 쌓이는 수행이며, 노동자에겐 방전이 되고 수행자에겐 충전이 된다. 오늘 하루는 주로 노동자로 살았는가, 수행자로 살았는가?

[2023년 6월 28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