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소태산 대종사는 열반 몇 해 전부터 미래 세상에 대한 말씀과 열반에 대한 암시를 종종 했다고 전한다. 〈대종경선외록〉에 기록되기를 소태산 대종사가 “앞으로 좋은 세상 온다. 너희들은 좋은 세상 보겠다”고 말씀했고, 이에 황이천이 “대종사님은 못 보십니까?” 하고 사뢰니 “나는 못보지. 여행을 가야겠다”는 말씀을 했다고 한다. 또한 황이천은 소태산 대종사가 열반하기 전에 뵀을 때 전혀 병색이 없었고, 오히려 황이천에게 서장 회의에 다녀온 일을 묻기도 해 황이천은 “종사님, 꾀병이지요?”라고 했다. 그리고 경찰서에 돌아와 곧 열반 소식을 듣게 됐다.

소태산 대종사의 열반 소식에 일경들은 긴급회의를 열었고, “이제 그들은 정산이 종법사에 올라도 파벌로 자멸하게 되리라”고 예측하며 도경에 ‘도토리 키 재보기’라고 보고했다고 한다.

원기28년(1943) 6월 1일 소태산 대종사 열반 후 제자들은 성해를 중앙총부에 모시려 했다. 유리관에 안치해 영구 보존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일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매장도 안된다며 빨리 화장하라고 불같이 성화를 냈다. 결국 그들의 성화에 장자산 공동묘지로 안장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강점기 당시는 사망한 이들을 모두 공동묘지에 장지를 마련하는 것이 법으로 명시돼 있었으나, 실제로 일제는 이를 구실로 소태산 대종사의 흔적을 지워가며 불법연구회의 와해와 분열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가 열반하매 제자들은 금강리 수도산 화장터에서 다비를 치렀다. 당시의 예법에는 화장 후 바로 묘지로 매장하지 않고, 49일 천도재를 지낸 뒤 묘를 쓰는 것이 통례였다. 

소태산 대종사의 성해를 종법실(구)에 모셔놓고 49일의 재를 모신 후 장자산에 임시 묘비(정확한 명칭이 없음)을 세웠다. 묘비에는 상단에 일원상을 그리고 밑으로 ‘○소태산일원종사지묘’라고 새겼다. 

이후 원기34년(1949) ‘대종사주성업봉찬회’에서 소태산 대종사의 성탑을 중앙총부에 새로 건립하며 이 비석은 파기했다. 당시 실무를 맡았던 이백철 원로교무의 증언에 따르면 “새롭게 소태산 대종사의 성탑을 조성함에 따라 전에 세워놓았던 비석은 파기(비신을 깼다, 비명을 지웠다는 증언도 있다)하기로 결정했다. 그에 따라 파기된 비석과 석물들은 중앙총부로 옮겨와 총부 구내에 여러 곳에 놓여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후 정확한 정황은 알아낼 수 없었으나, 현재 소태산 대종사 성탑 뒤편 송림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이 비석에 대한 이야기가 재거론 된 적이 있었다. 당시의 묘지를 이루던 비석과 석물들이 문화재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있으므로, 이를 복원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하지만 이견도 있다. ‘공의로서 결론이 났고 시행된 사안을 다시 거론해야 할까’하는 입장과 ‘소태산 대종사 성탑이 명확히 존재하는데, 공의로 파기해 원형을 잃어버린 석물을 교단 문화재로 등록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등의 의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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