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소태산 대종사 강변에서 선정에 들다
소태산 대종사는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채무이행을 하고 난 뒤 22세 무렵 우두커니(入定) 있는 시간이 늘어만 갔다. 23세 되던 여름 장마로 인하여 귀영바위 집이 무너져 노루목에 빈집이 있어 이사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노루목으로 이사하고 고창 연화봉으로 수양을 다녀왔다.
그 후부터는 장소 구분 없이 입정에 든 시간이 늘어가던 어느 날 아침, 정신이 맑아지자 법성포 장에 가기 위해 장꾼들과 동행하여 선진포 나루로 갔다. 장꾼들은 배로 법성포 장에 가고 소태산 대종사는 한쪽에서 배를 기다리며 서 있다가 입정에 들었다.
장꾼들이 장을 보고, 해 질 녘에 선진포 나루로 돌아와 보니 집으로 간 줄 알았던 소태산 대종사가 느티나무 아래에 장승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깜짝 놀란 장꾼들이 집에 연락하여 가족들이 소태산 대종사를 데리고 왔다. 소태산 대종사가 선진포 나루에서 입정에 들었던 시기는 노루목에서 정진 중이었던 24∼25세경으로 전해질뿐 교단 초창기 문헌 기록에 정확한 시기는 보이지 않는다.
선진포 나루는 행정구역상 영광군 백수읍 장산리에 속한 나루로 장산리뿐만이 아니라 길룡리 등 인근 주민들이 법성포로 가는 중요 교통로였다. 1986년(원기71) 소태산 대종사가 선진포 나루에서 입정했었음을 알리는 ‘선진포입정터비’를 자연석에 내력을 적어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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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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