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소태산 대종사 강변에서 선정에 들다

선정에 들었던 영광 선진포 나루, 1943년(원기28) 촬영
선정에 들었던 영광 선진포 나루, 1943년(원기28) 촬영

소태산 대종사는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채무이행을 하고 난 뒤 22세 무렵 우두커니(入定) 있는 시간이 늘어만 갔다. 23세 되던 여름 장마로 인하여 귀영바위 집이 무너져 노루목에 빈집이 있어 이사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노루목으로 이사하고 고창 연화봉으로 수양을 다녀왔다.

그 후부터는 장소 구분 없이 입정에 든 시간이 늘어가던 어느 날 아침, 정신이 맑아지자 법성포 장에 가기 위해 장꾼들과 동행하여 선진포 나루로 갔다. 장꾼들은 배로 법성포 장에 가고 소태산 대종사는 한쪽에서 배를 기다리며 서 있다가 입정에 들었다.

장꾼들이 장을 보고, 해 질 녘에 선진포 나루로 돌아와 보니 집으로 간 줄 알았던 소태산 대종사가 느티나무 아래에 장승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깜짝 놀란 장꾼들이 집에 연락하여 가족들이 소태산 대종사를 데리고 왔다. 소태산 대종사가 선진포 나루에서 입정에 들었던 시기는 노루목에서 정진 중이었던 2425세경으로 전해질뿐 교단 초창기 문헌 기록에 정확한 시기는 보이지 않는다.

선진포 나루는 행정구역상 영광군 백수읍 장산리에 속한 나루로 장산리뿐만이 아니라 길룡리 등 인근 주민들이 법성포로 가는 중요 교통로였다. 1986(원기71) 소태산 대종사가 선진포 나루에서 입정했었음을 알리는 선진포입정터비를 자연석에 내력을 적어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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