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8년(1923) , 영광 범현동에 영산회상을 건설하다

구간도실을 옮겨 지은 영산원의 옛 모습(원기40년대 후반 촬영)
구간도실을 옮겨 지은 영산원의 옛 모습(원기40년대 후반 촬영)

원기8(1923) 음력 6월 말, 소태산 대종사는 봉래정사에서 서중안 부부의 간청을 받고 새 회상을 열기로 했다.

그러다 모친(유정천(劉定天))의 환우 소식에 영광 연성리 아우 동국(東局)의 집으로 가서 모친을 간호하며 인간의 생사는 다 천명(天命)이 있는 것이오니, 안심하시고 항상 일심 청정의 진경(眞境)에 주하십시오라고 위로하고 봉래정사로 돌아왔다. 얼마 후 모친이 열반하자 소태산 대종사는 각지의 제자들과 치상(治喪)을 마치고 제자들과 영산으로 와서 옥녀봉 아래 도실(道室)에 모였다.

그러나 갑자기 많은 제자가 모이자 도실은 장소가 협소했다. 지대가 낮아 습하고, 위치가 외진 곳에 있는 등 여러 불편도 있었다. ‘많은 대중이 모이기 좋은 곳으로 도실을 옮겨 짓자는 발의가 나왔고, 제자들은 회상 창립을 위해서라면 일신을 바쳐서라도 힘써 일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돛드레미(범현동, 帆懸洞) 산기슭에 터를 정하고 3개월여 동안 옥녀봉 아래 도실을 옮겨 목조 초가 5칸 겹집을 짓고, 아래채(현 학원실)와 식당채(소실됨)를 좌우에 8칸씩 신축해 음력 11월에 완공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 집을 3,000여 년 전 부처님 영산회상(靈山會上)을 다시 건설하리라는 뜻을 담아 영산원(靈山院)’이라 이름 붙였다. 영산원 건설은 회상을 공개하고 총부 건설에 대한 의지가 불타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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