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오광익 원로교무] 우리는 “일근이지(一根二枝)”를 알아야 한다. 즉 ‘한 뿌리에 두 가지’임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이니 이에 한 뿌리란 근원이 되는 진리를 이름이요, 두 가지 중의 하나는 생도 없고 멸도 없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요 또 한 가지는 원인과 결과가 분명한 ‘인과보응(因果報應)’이다. 결국 이 두 가지 진리가 들어서 우주와 만물을 운행하고 경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만일에 두 가지에서 하나만 없어도 우주와 만물은 멈출 수밖에 없으니 이 둘이 균형을 맞추어 운전이 됨으로서 우주의 성주괴공(成住壞空)과 만물의 생로병사(生老病死)가 호리도 틀림없이 전개된다. 따라서 변불변(變不變)이나 음양상승(陰陽相勝)이나 육도승강(六道昇降) 등이 드러나게 된다.

우리는 ‘인과에 있어서 다섯 가지’를 알아야 한다.

첫째, 정업난가멸(定業難可滅): 결정된 업은 가히 소멸시키기 어렵다. 흔히 정업난면(定業難免)이라 한다. 이미 결정이 된 업은 억지로 소멸시킬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요. 다 주고 다 받은 뒤라야 비로소 상쇄(相殺)가 되어 정업(淨業)이 된다.

둘째, 선업불보악(善業不報惡): 선업은 악업으로 갚아지지 않는다. 악인득악과(惡因得惡果)이요 선인득선과(善因得善果)이다. 즉 ‘악한 인은 악한 결과를 얻게 되고, 선한 인은 선한 결과를 얻게 된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감나무에서 배를 딸 수 없듯이 선악의 과보가 다를 수밖에 없다.

셋째, 부작무유수(不作無攸受): 짓지 않으면 받아지는 바가 없다. 아무리 잘 살고 싶어도 지은 바가 없으면 될 수가 없고, 아무리 고작(高爵)에 오르고자 해도 닦아놓은 바가 없으면 나아가기 어렵다. ‘계란유골(鷄卵有骨)’이라는 황희(黃喜) 정승은 좋은 예이다.

넷째, 오조간득호(誤造艱得好): 잘못 지었으면 좋게 얻기가 어렵다. 보통 보살조업(菩薩造業)이요 중생득과(衆生得果)이다. 즉 보살은 업을 지을 때 잘 짓기 때문에 과보 받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만 반면 중생은 업은 잘못 지어놓고 받아지는 과보가 좋게 되어지기를 바라나니 이는 크게 어긋난 아륜(牙輪:톱니바퀴) 같은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다섯째, 개업난한불(個業難捍佛): 개인의 업은 부처의 위력으로 막기 어렵다. 무릇 우리가 고업(苦業)이나 악업(惡業)을 교단이나 법이나 부처의 힘을 빌려서 녹이고 막으려는 것은 큰 잘못이다. 그리하여 원불교를 믿고 부처를 가까이해도 잘 살지 못하고 잘 되지도 않는다고 투덜댈 수가 있다.

송(頌)하기를
一根枝二出(일근지이출)  한 뿌리에 가지 둘 나오니
因果與無生(인과여무생)  인과와 생멸이 없는 것이라
自作心身受(자작심신수)  스스로 지음을 심신으로 받아 
釐毫不忒傾(리호불특경)  조금도 틀리고 기울지 않누나.

[2019년 11월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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