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길튼 교무

[원불교신문=방길튼 교무] ‘일원상 법어’의 법어(法語)는 법(法) 받을 법으로,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일원상을 법으로 체받아서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사용할 때 일원상과 같이 쓰라는 것이다. 즉 눈을 사용할 때도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작용하라는 것이며 코도 입도 귀도 몸도 마음도 마찬가지로 행하라는 것이다.

다음에 해야지, 조금씩 해야지, 차츰차츰 해야지 이러한 한계를 다 놓아버리고 온통 전체적으로 한꺼번에 일원상 그대로 전개하라는 것이다. 결여된 부분으로 할 것이 아니라 온전하게 통째로 한순간에 일원상 그대로 실행해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다 여길 정도로 전면적으로 나투라는 것이다. 심신을 원만구족 지공무사하게 쓰라는 것이다.

꽃을 볼 때 보는 당체에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일원상이 활짝 피어 있고, 소리를 들을 때 듣는 당체에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원음(圓音)이 울리고, 냄새를 맡을 때 향을 맡고 있는 당체에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원향(圓香)이 온전히 진동하고, 또한 맛을 볼 때 평등일미의 일원상 자리에서 감미하고, 일을 할 때 부동한 일원상 자리에서 일하고, 산행할 때 고요한 일원상 자리에서 등산하고, 생각을 할 때 생각에 물들지 않는 청정한 일원상 자리에서 생각하고, 감정이 일어날 때 감정에 빠지지 않는 걸림 없는 일원상 자리에서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이다.

일원상은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으로, 고민하는 당처를 돌이켜 직시하면 고민이 붙을 수 없는 텅 비어 고요한 본래자리가 드러나며 또한 이렇게 텅 비어 고요하기에 고민이 명백한 것이다. 그러므로 고민을 고민 그대로 자각하는 자리는 청정 원만한 자리이며 고민을 확연히 알아차리고 있는 지혜가 구족한 자리이다. 또한 화가 나면 화난 그대로, 짜증나면 짜증 그대로, 웃으면 웃는 그대로 드러내는 공변되고 사사로움이 없는 지공무사한 자리이다.

이와 같이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사용할 때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일원상을 통째로 온통 쓰라는 것이다. 육근이 육경을 인연해 육식이 발할 때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일원상 이 자리에 바탕하라는 것이다. 육근도 일원상이요 육경도 일원상의 드러남이요 육식도 일원상의 발현인 것이다. 

안식이 눈을 통해 알 듯이 이식도 비식도 설식도 신식도 귀·코·입·몸을 통해 아는 것이며, 또한 의식도 의근을 통해서 법경인 개념 등을 식별해 아는 것이다. 의근은 의식의 근거지인 앞생각의 전부로, 의식은 앞생각에 근거해 상속하는 흐름이다. 이때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일원상을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일원상을 법으로 삼아 일원상 자리에서 육근-육경-육식을 작용하라는 것이다.

지금 당장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일원상 자리에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말하고, 느끼고 행하고, 식별하는 것이다. 이처럼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일원상을 법으로 체받아서 육근을 작용할 때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일원상으로 온통 행하는 것이 곧 ‘일원상 법어’의 구현인 것이다.

/나주교당

[2020년 4월 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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