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길튼 교무

[원불교신문=방길튼 교무] 일원상서원문에 “법신불 일원상을 체받아서”가 등장한다. 이 ‘체받는다’의 체(體)는 전체·대체·총체·구체의 용례처럼, 일원상을 전체로 대체로 총체로 체득해 구체적으로 사용하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동아시아권에서는 체(體)는 몸이라면 용(用)은 몸짓으로 통용된다. 몸이 있으니 몸짓이 있고 몸짓은 몸의 활동이듯 체와 용은 한자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법신불 일원상을 체받아서”는 법신불인 일원상을 온통 통째로 받아서 그 상황에 따라 구체적으로 사용하라는 것이다. 

또한 “법신불 일원상을 체받아서”의 체는 법신불인 일원상을 바탕과 기반으로 삼아라는 뜻이 있다. 즉 법신불 일원상을 삶의 배경으로 품으라는 것이다. 이렇게 법신불 일원상을 배광(背光)과 후광(後光)으로 모실 때 경계를 일원상으로 비출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공부 하고자하나 보통은 경계에 끌려 마음은 까맣게 잊고 찾을 길도 망막하게 된다. 마음공부는 마음을 깨달아서 마음을 잘 사용하는 것이므로, 일원상을 바탕(背光) 삼으면, 설사 경계에 끌린다 해도, 일원상 자리에서 놓쳤기에, 일원상을 떠난 것은 아니므로, 일원상을 챙기기만 하면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땅에서 넘어졌기에 땅으로 일어설 수 있는 격이다.

일원상을 체받는 것은 삶의 배경에 일원상을 기반토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본래 일원상의 품 밖으로 벗어날 수 없기에 일원상만 챙기면 공부심을 다시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설사 마음공부를 놓쳤다 해도 일원상 자리에서 넘어졌기에 일원상으로 일어서라는 것이다. 즉 일원상의 품에서 일원상으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교법의 총설’의 “법신불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모시고”는 “법신불 일원상을 체받아서”의 다른 표현으로, 대상으로 모시고 표본으로 삼는 것이 곧 체받는 것이다. 체받는 것은 글씨 배우려는 사람이 좋은 글씨체를 받은 것과 같고, 수(繡) 배우려는 사람이 좋은 수본(繡本)을 얻은 것이라 비유한다.(대종경선외록 일심적공장 6절) 즉 일원상의 내역을 신앙과 수행의 체본과 수본으로 삼아 현실생활에 연락시키라는 것으로, 마치 가전제품을 전기코드에 꽂아 사용하는 것과 같으며, 인터넷에 접속하여 온갖 사이트를 활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표본으로 모신다할 때 ‘표본과 주체’의 이원성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원상을 표본으로 모시는 것은 표본으로 모시는 마음 밖에 따로 주체할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원상을 표본으로 삼는 자리가 곧 일원상을 사용하는 주체이다. 일원상으로 하나 되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일원상의 체현(體現)은 사은의 도(道)이다. 사은 중 천지 8도를 체받는 것은 일원상을 체받는 실제요, 부모보은의 대요인 무자력자 보호의 도, 동포보은의 대요인 자리이타의 도, 법률보은의 대요인 정의를 세우고 불의를 제거하는 도도 일원상을 체받는 실상이다. 결국 일원상을 체받는 것은 곧 사은의 도를 체받는 것이다.

/나주교당

[2020년 4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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