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은 교무

[원불교신문=임진은 교무] 오래전에 ‘엄마가 뿔났다’라는 주말드라마가 있었다. 주인공인 60대 주부 한자는 가난한 집 딸로 자라 25살에 친구의 오빠와 사랑 하나로 결혼했다. 천진난만하고 착한 성격으로, 어려운 형편이지만 시동생 뒷바라지까지 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돈에도 출세에도 무능하고 오로지 좋은 사람일 뿐인 남편과 얽혀 보낸 세월이 억울해지고, 자식들도 속을 썩이면서, 점차 ‘나는 뭔가’라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여학생 시절부터의 소원은 책만 읽으면서 사는 것. 몇십 년간 묵묵히 며느리이자 엄마의 역할로 살던 한자는 결국 가족들에게 긴 휴가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말 많고 탈 많은 휴가를 마치고, 마지막 회에서 한자는 말한다. 지금의 삶도 감사하고 행복하지만, 다음에 다시 태어난다면 자신의 이름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고 싶다고. 당시 시청률이 1위였다고 하니, 한자의 이런 마음을 아마도 많은 분들이 공감했던 것 같다.

‘페르조나’라는 단어를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뜻하는 말로, 마치 배우가 가면을 쓰는 것처럼 자아가 외부세계와 관계를 맺을 때 사용하는 외적 인격을 말한다. 한 마디로 ‘사회적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주고받는 명함 속의 직업이나 직함, 성별, 연령뿐만 아니라 누구의 아내나 남편, 딸, 아들, 형, 동생 등으로 불리는 것은 모두 페르조나를 만든다.

제복 역시 페르조나의 대표적인 사례이며, “00다워야 한다” “00답게 행동해라”라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점차 자신의 페르조나에 익숙해지며, 상대방에게도 적합한 역할을 요구 또는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사회적 역할을 이렇게 페르조나, 즉 가면 또는 탈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이것이 인생의 궁극적 목표나 본질이 아닌 삶의 한 방편이기 때문이다.

페르조나는 사회나 집단이 만들어준 틀이라서 자신의 진정한 삶이나 가야 할 길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방편임을 깨닫지 못하고 페르조나와 지나치게 동일시하는 데서 생긴다. 즉, 자신의 내면은 돌보지 않고 주어진 역할에만 지나치게 충실하게 사는 것이다. 만약 인생의 목표를 그저 페르조나에만 일치시켜서 살아간다면, 자신의 본성을 자각하거나 발휘할 수 없게 되고, 몸과 마음의 건강도 잃을 수 있다.

오랜 세월 회사 일에 성실했던 직장인이나 가족에게 헌신했던 아버지, 어머니가 중년에 이르러 겪게 되는 우울이나 상실감 등은 대개 이런 페르조나와의 강한 동일시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 체면을 강조할수록 페르조나는 자연히 경직되고, 본래의 맑고 밝고 여유로운 마음과는 멀어지게 된다.

물론 페르조나를 벗는 것만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사회가 잘 유지되기 위해서는 집단의 규칙을 배우고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면서 질서 속에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페르조나와의 지나친 동일시도 문제지만, 적절한 페르조나를 갖추지 못하는 것 역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된다.

따라서 청소년기와 청년기에는 반드시 페르조나를 적극적으로 배우고 형성해나갈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진정한 자기 자신과 페르조나를‘구별’하는 데 있다. 특히 중년에 이르면 내적 성장을 위해 이러한 구별은 꼭 필요하다. 이를 통해, 진정한 자신을 돌보면서, 페르조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필요할 때마다 적절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원광대학교

[2020년 4월 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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