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은 교무

[원불교신문=임진은 교무] 명상에 대한 교양수업 내용 중에 듣기 명상이 있다. 서로 한 번도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는 사람과 짝이 되어서 마주 앉게 하고, 한 사람씩 차례로 주어진 시간 동안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를 하게 한다.

이때 상대방은 그 이야기에 전적으로 주의를 기울인다. 만약 침묵하면 조용히 기다려주는 것도 규칙 중 하나다. 신기하게도, 처음에는 낯선 이 상황에 어쩔 줄 몰라 하던 학생들도 어느새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밝은 표정으로 재밌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게 된다. 학생들은 명상을 듣기에 적용할 수 있다는 데 놀라워하고, 내 이야기를 누군가 집중해서 들어주는 것이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인 줄 몰랐다고 말하기도 한다. 아마도 좋은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가끔은 다 터놓고 이야기만 할 수 있어도 마음이 가벼워지지만,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이 생각보다 귀한 일이다. 곧바로 해결책을 제시해주려 하거나, 자기 관점에서 해석하거나, 심지어는 대화를 하면 할수록 오히려 꼬여간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갈등을 해소해보려고 또는 좀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 서로 열심히 이해를 구해보지만, 상황을 객관화하고 관점의 차이를 그대로 지켜보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인 것 같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일반적으로 대화의 반 이상은 듣는 것이 차지한다. 잘 듣는다는 것은 상대방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명확하게 감지하고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진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는 것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적으로 전달하는 내용 외에도 목소리, 표정, 말투, 태도와 같은 비언어적인 부분까지 섬세하게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부분이 더 많은 정보를 담고 있고, 훨씬 강력한 전달력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잘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실행이 어려운 이유는 그 자체가 ‘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잘 듣는 것을 방해하는 몇 가지 요인들이 있다.

먼저, 자신의 선입견이나 편견에 갇히는 것이다. 즉, 은연중에 나는 이미 그 사람이나 주제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고 그래서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쉽게 판단하고 평가하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또 자신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을 때도 잘 듣기가 어렵다. 이미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상황과 심정을 담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의 심각한 문제를 알게 된 후에 다른 사람의 좀 더 사소해 보이는 문제를 듣게 될 때도 마찬가지다. 나도 모르게 별로 고민할 것 없다는 식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자연히, 말하는 사람이 전하고자 하는 무게는 다 외면된다.

이 외에도,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꾸 내 경험이 떠올라서 말하고 싶어질 때, 돕고 싶은 마음이 너무 앞서거나 지나치게 동정적인 마음이 될 때도 객관성을 잃게 되고 제대로 듣기가 어렵다. 이 모든 요인을 관통하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이야기를 듣고 있는 그 순간의 ‘비어 있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일상의 대화도 그렇지만, 좀처럼 꺼내기 힘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일수록 그 자리의 ‘청정함’은 필수적이다.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은 청정함 속에서 상처를 깊이 열어 보일 수 있고, 치유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된다. 만약 무엇에라도 오염된다면, 마음을 연 그 사람은 오히려 해를 입을 수도 있을 것이다. 따뜻함과 회복, 지혜가 시작되는 곳, 청정한 마음으로 듣는 것은 바로 그런 곳이다.

/원광대학교

[2020년 5월 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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