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익 원로교무

[원불교신문=오광익 원로교무] 정전에 ‘의라함은 일과 이치에 모르는 것을 발견하여 알고자 함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모르는 것을 알아내는 원동력이니라’고 했다. 이에 의란 사리를 각지(覺知)하는 길이요 방법이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유가에 생지(生知), 학지(學知), 곤지(困知)라는 말이 있다. 생지는 생이지지(生而知之)를 말하고, 학지는 학이지지(學而知之)를 말하며, 곤지는 곤이지지(困而知之)를 말한다. 이러한 삼지(三知) 가운데 생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학지나 곤지가 인의득지(因疑得知)를 하고 생의득지(生疑得知)를 한다는 법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수행을 한다는 것은 결국 지혜(智慧)를 계발하자는 것인데 그 방법은 다양하다. 꼭 의심(疑心)을 가져야만 지혜가 열리게 된다는 것은 정답이요 정로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불가의 선가귀감(禪家龜鑑)에 ‘참선하는 데는 반드시 세 가지 요긴함을 가져야한다’ 했으니 첫째는 큰 신심(信心)이요, 둘째는 큰 분심(憤心)이며, 셋째는 큰 의심(疑心)이라 했다. 이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절족지정(折足之鼎)으로 종성폐기(終成廢器)가 된다고 했지만 꼭 이 길이 필요불가결(必要不可缺)의 정정(定程)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이에 덧붙여 몇 개를 들어보면 부처님은 “부처를 이룸에는 믿음이 뿌리가 되니라”라고 했고, 또 영가선사는 “도를 닦는 자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하니라”라고 했으며, 몽산선사는 “참선하는 자가 언구(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이것이 큰 병이 되니라”라고 했으며, 또 “크게 의심하는 아래서 반드시 크게 깨침이 있느니라”라고 했다. 이 의에는 정의(正疑)와 사의(邪疑)가 있다. 바른 의심이란 사리 간에 정당한 의심을 갖고 진리·법·스승·회상에 대해 확고한 마음을 정하고 알려고 노력하며, 큰 서원과 굳은 신심으로 의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삿된 의심이란 정당한 진리를 믿지 않거나 스승과 법을 저울질하고 잣대질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바른 의심을 가지면 일에 밝고 진리를 깨닫게 되지만 반면에 삿된 의심을 갖게 되면 수행에 도움이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몽산화상(蒙山和尙)은 “화두에 의심이 끊어지지 아니하면 이것을 참의심이라 이름하니, 만약 의심을 한번 잠깐하고 또 의심함이 없으면 진심으로 의심을 발한 것이 아니라 주작에 속하느니라. 이런 연고로 혼침과 잡념이 다 마음에 들게 되느니라”라고 했다. 

송(頌)하기를
의자지지매(疑者知之媒) 의심이란 알음알이의 매개이요
수이각진정(隨而覺進程) 따라서 깨달음으로 나가는 길이네
비장성역대(丕藏醒亦大) 크게 갈무리면 깨달음 또한 크리니
심축지천영(心蓄地天盈) 마음에 쌓아서 하늘땅을 채울지라.

/중앙남자원로수양원

[2020년 5월 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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