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익 원로교무

[원불교신문=오광익 원로교무] 정전에 ‘성이라 함은 간단없는 마음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그 목적을 달하게 하는 원동력이니라’라고 했다. 

성이란 우주만물에 대해 결과에 이를 때까지 조금의 쉼이 없이 지극한 정성을 다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중용(中庸)에 “그렇기 때문에 지극한 성은 쉼이 없다(故至誠無息)”라고 했다. 

또 “성은 스스로 이루어가는 것이고, 도는 스스로 길을 내며 가는 것이라(誠者自成也 而道自道也)” 또 “성은 물의 끝과 시작이니, 성하지 않으면 물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는 성을 귀중하게 여긴다(誠者物之終始 不誠無物 是故君子誠之爲貴)” 또 “성이란 스스로 자기에게 이룰 뿐만 아니라, 사물까지도 이루어준다(誠者 非自成己而已也 所以成物也)”라고 했다.

이러한 글귀를 보더라도 “정성도처 무소불성(精誠到處 無所不成)”이다. 즉 ‘정성이 이르는 곳에 이뤄지지 아니한 바가 없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은 “시어성 행어성 종어성 성원재기중(始於誠 行於誠 終於誠 成願在其中)” 곧 ‘성에서 시작하고 성에서 행하며 성에서 마친다면 서원을 이룸은 그 가운데 있다’라는 의미이다. 

글을 지으니 “무릇 깊은 산골짝이 물이 작은 샘에서 솟아 바위 틈과 돌 사이를 흐르고 얕은 시내와 깊은 웅덩이를 흘러서 조금도 쉬는 바가 없이 흐르면 반드시 큰 바다에 이를 것이요, 또한 작은 동산 언덕에 어린 나무가 홀로 서서 이에 차가움과 눈을 참고 비와 이슬을 견디어서 어린 가지를 뻗고 어린 잎을 내고 붉은 꽃을 피우고 튼실한 열매를 맺음은 볼 수도 없으며 들을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으며 알 수도 없는 한 이치 한 기운의 정성이 있어서 다함이 없는 조화를 부리기 때문이라 이르리라”      

옛 문헌에서는 성을 어떻게 말했을까?
① 설문(說文)에 “성은 믿음이다(誠信也).” ② 중용에 “성이란 하늘의 도이요 성하려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誠者天之道也 誠之者人之道也).” ③ 맹자에 “자기 몸에 돌이켜보아 성실하면 즐거움이 이보다 더 클 수 없다(反身而誠樂莫大焉).” ④ 주희(朱熹) 사서집주·중용주(四書集注·中庸注)에 “성이란 진실하여 망령됨이 없음을 이름이니 하늘 이치의 본연이라(誠者 眞實無妄之謂 天理之本然也).”

송(頌)하기를
눈엽위홍엽(嫩葉爲鴻葉) 어린잎이 커다란 잎으로 되는 것은
유성불타유(唯誠不他由)  오직 정성이요 다른 이유가 아니네 
공인사실체(功人斯實體) 공부하는 사람이 이 사실 체득하면
불조궐중유(佛祖厥中遊) 부처조사 그 가운데서 놀으리라. 

/중앙남자원로수양원

[2020년 5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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