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길튼 교무

[원불교신문=방길튼 교무] ‘교법의 총설’에서 “우주만유의 본원이요 제불제성의 심인인 법신불 일원상을 수행의 표본으로 모시고 수양·연구·취사의 삼학을 수행의 강령으로 정하여”라고 명시하고 있다. 즉 일원상은 삼학으로 펼쳐야 하고 삼학은 일원상에 근거해야 한다는 뜻이다. 일원상에만 그쳐 있어도 안 되고 삼학만 있어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일원상만 있으면 현실에 무력할 것이고, 삼학만 있으면 근원이 단절된 자의적 행위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일원상서원문’에서 ‘법신불 일원상’을 체받아서 ‘심신을 원만하게 수호하는 공부’를 또는 ‘사리를 원만하게 아는 공부’를 또는 ‘심신을 원만하게 사용하는 공부’를 지성으로 하라 한 것이다. 일원상을 수행의 표본으로 삼아 수양력·연구력·취사력을 나투라는 것이다. 즉 일원상인 삼학으로 일원상의 삼대력을 갖추라는 것이다. 결국 일원상을 수행의 표본으로 삼지 않는 삼학은 기반 없는 수행이며, 삼학으로 나투지 않는 일원상은 결실 없는 나무와 같은 것이다. 

일원상은 분별없는 자리와 분별 있는 자리를 관통하므로, 분별없는 줄 만 알고 분별 있는 줄을 모르면 안 된다.(정전 참회문) 분별이 없는 가운데 분별이 역력하고 분별이 역력한 가운데 분별없는 자리에 들어야 한다. 만일 분별없는 절대 자리만 체득하면 궁극에 이르러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다 한다면, 이는 일원상을 수행의 표본으로 삼는 본의를 모르는 것이다. 즉 상대가 끊어진 분별없는 절대 자리만 체득하면 공부도 수행도 다 마쳤다 여긴다면 ‘일원상의 수행’을 오해한 것이다. 분별이 없는 절대 자리에서 보면 닦을 것이 없으나, 이는 분별이 역력한 현실에서 끊임없이 닦되 본래 닦을 것이 없다는 것이지, 실제 수양할 것도 연구할 것도 취사할 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다.

일원상 성품에 본래 삼대력이 구족해 있다 해서 삼대력을 다 닦았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구족된 삼대력을 현실에서 끊임없이 구현되도록 수행하라는 것이다. 본래 삼대력이 구족한 일원상은 수행의 표본으로 모시는 자리라면, 이 자리는 또한 현실에서 끊임없이 수양·연구·취사의 삼학으로 삼대력을 나투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상대가 끊어진 절대 자리만 붙잡고 있으면서 삼학이 다 구현되었다고 여기면 큰 착각이다. 우리는 닦을 것이 없는 성품자리에서 삼학으로 끝없이 닦아야 하며, 삼학으로 닦고서도 닦을 것이 없는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 설사 닦을 것이 없는 성품자리에 들었다 해도 실지로 삼학 수행하지 않으면 ‘일원상의 수행’은 아닌 것이다. 

선정에 들어 멸진정 할 수는 있어도 현실에서 삼학을 나투지 못한다면 이는 ‘일원상 수행’의 공덕은 아닌 것이다. 분별없는 자리에만 머물러서 더 이상 배울 것도 더 닦을 것도 없다며 유유자적하게 노니는 것을 수행의 진면목이라 여긴다면, 이는 더 이상 닦지 않아도 될 정도로 온전하게 수행하라는 ‘일원상의 수행’에 대한 왜곡으로, 결국 삼학수행의 미진일 뿐이다.

/나주교당

[2020년 5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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