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은 교무

[원불교신문=임진은 교무] 무의식 속에는 ‘그림자’라는 것이 있다. 그림자는 어두운 측면, 즉 무의식에 있는 열등한 인격을 말한다. 자아가 어떤 것을 지향하면 할수록 그와 맞지 않는 것들이 생기는데, 그런 부분들이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 그림자를 형성한다. 고상하고 높은 인격을 지향하다 보면 미숙하고 바람직하지 않고 도덕적으로 열등한 성격부분들은 억압되고, 그림자가 된다. 

그림자는 그 자체로는 자각하기가 어렵고, 주로 투사를 통해 감지할 수 있다. 투사란 자기 마음속에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밖에 있다고 하는 현상으로, 영사기를 통해서 스크린 영상을 보면서, 마치 그 영상이 스크린에 있다고 믿는 것과 같다. 그림자는 투사를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살다 보면 간혹 주변 사람에 대해서 껄끄럽고 싫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 사람을 볼 때마다 무책임하다거나, 가볍다거나, 버릇없다거나, 까다롭다거나, 잘난체한다거나 등등의 불쾌한 감정이 넘실거린다. 왠지 모르게 못마땅하고, 대화 중에 어쩌다 그 사람에 대한 말이 나오면 한 마디라도 깎아내리지 않고는 못 배긴다.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하겠지만, 정도 이상으로 강렬한 감정이 올라오고 그런 감정으로부터 좀처럼 벗어날 수 없다면, 그것은 자기 ‘그림자의 투사’일 가능성이 높다. 말하자면, 사실은 나에게 있는 모습인데 그것이 상대방에게 있다고 생각하면서 맹렬히 비난하는 것이다. 

그림자는 열등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것이 밖으로 투사되면 상대방이 너무나 미숙하고 부적절하게 보이는 등 부정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따라서 그런 용납하기 어려운 면이 ‘나에게’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결국 상대를 비난함으로써 나는 끝까지 괜찮은 사람으로 남으려 한다. 물론 의식적으로 그러는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삶의 경험 한 편을 억압하고 무의식에 있는 또 하나의 마음을 외면하는, 결코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그림자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삶의 가치를 고민하고 바람직한 방향을 추구하는 한, 그것에 어울리지 않는 것들은 무의식 속으로 억압되기 쉽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의 그런 기능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무의식 속의 또 다른 나, 그림자를 ‘살려내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를 향해서 자꾸 부정적인 감정이 강렬하게 느껴진다면, 그때가 바로 나의 그림자를 만날 수 있는 최적의 기회이다. 지금 비난하고 있는 바로 그 측면이 사실은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 그런데 그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나에게 다시 가지고 오는 것이 첫 번째 과제다. 이렇게 되면 다른 사람에 대한 편견을 줄이고, 서로 비난하는 일을 멈출 수 있다. 자연히 스스로에 대한 성찰 역시 깊어진다. 그림자는 원래부터 열등한 특성들이 아니라, 그동안 무의식 속에 갇혀 있느라 발달하지 못했던 부분들이기 때문에, 명확히 인식하고 성찰하는 과정을 거치면 보다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활용될 수 있다. 

인격적인 성숙은 좋은 특성, 바람직한 습관만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나에게 있는 긍정적인 특성뿐만 아니라 때로는 유치하고, 소심하고, 적대적인, 사회적인 관점에서는 좋지 않게 볼 수도 있는 이런 다양한 특성들을 온전히 인식하면서, 그 모든 측면을 나의 영역으로 ‘통합’시키는 데 성숙의 길이 있다. 그 길 위에서, 비로소 나는 더욱 확장된 의식으로 구체적인 변화를 만들어갈 수 있다. 

/원광대학교

[2020년 5월 15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