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윤 교무
현지윤 교무

[원불교신문=현지윤 교무] ‘그는 안착되는 발로 땅을 디디고 균형 있게 들어 올리고, 골고루 모든 부분의 발바닥으로 땅을 밟는다.’ 붓다의 신체는 32가지 호상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중 하나가 발의 두터움이다. 붓다는 어떻게 그렇게 단단하고 두툼한 발을 가지게 됐을까. 수억 겁의 생을 반복하면서 온갖 보시와 선행을 했기 때문이란다. 땅에 착 붙는 발을 가지려면 무한에 가까운 보시와 선행이 필요한 것이구나. 

붓다는 길 위에서 태어나 길 위를 떠돌다가 길 위에서 삶을 마쳤다. 붓다의 두툼한 두 발, 한없는 길과 맞닿았을 그의 발바닥이 눈물겹다. 당시 인도 북부에는 16개의 작은 나라가 있었다. 붓다의 설법 여행은 주로 마가다(Magadha)국을 중심으로 국경을 넘나든다. 붓다가 열반한 땅은 쿠시나가르(Kushinagar)다. 탄생지 룸비니에서 동남쪽으로 160킬로미터, 마가다국 수도 왕사성(Rajgir)에서 북서쪽으로 300킬로미터쯤 되는 곳이다. 이미 80세에 이른 붓다에게 왕사성에서 쿠시나가르로 가는 마지막 여행은 힘겨운 길이었다. 

그는 걷는다. 그동안 참으로 많은 길을 걸었다. 이제 노구를 이끌고 마지막 길을 걷는다. 머물고 설법하며 몇 달에 걸쳐 걸었을 것이다. 붓다는 이 길에서 곧 다가올 열반을 몇 차례 예고한다. 붓다의 걸음이 멈춘…. 열반. 평범하지만 위대한 그곳, 쿠시나가르에 있는 열반당 안에 들어가면 붓다의 열반상과 마주할 수 있다.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몸을 서쪽으로 비스듬히 눕혔다. 열반상에서 가장 강하게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붓다의 두툼한 두 발과 평평한 발바닥이다. 온전히 이 두 발로 그 길을 걸었구나. 붓다를 이곳까지 걸어오게 한 힘은 무엇일까. 팔만사천 무량법문, 전법(傳法)인가. 그는 첫 설법을 한 녹야원에서 발제하 곧 쿠시나가르에 이르기까지 이 중간에 일찍이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 한다. 길 위에서 보낸 49년, 붓다의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 그대, 무엇을 전해 받았나.

인류의 직립보행은 인류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다. 직립하는 순간 두뇌의 용량은 폭발하고, 발에서 벗어난 두 손으로 수많은 창조 작업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두 발로 선다는 건, 발은 땅을 디디고 눈은 하늘을 응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붓다가 그렇게 대지에 발을 밀착할 수 있었기에, 그의 시선이 그토록 심오하고 무량하며 현묘할 수 있었다. 고전평론가 고미숙 선생은 ‘산다는 것’은 곧 ‘선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간혹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물음이 올라오면, 산다는 것은 서는 것(自立)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한다. 

천지 사이에 우뚝 선 존재로 걸어가자. 몸으로 실행하고 마음으로 증득해 만고 후세에 이 법통이 길이 끊이지 않게. 삶이란 내가 오늘 내딛는 수많은 걸음이다.

 /휘경여자중학교

[2020년 6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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