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길튼 교무
방길튼 교무

[원불교신문=방길튼 교무] 소태산 대종사는 ‘사요’의 첫 조목으로 자력양성을 제시한다. 자력을 양성해 자력으로 사는 것이 떳떳한 길이라는 것이다. 사요의 자력양성은 일원상에 근원한 자력이다. 일원상 자리는 상대가 끊어진 상독로(常獨露)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의두요목 2조)이요 만법으로 더불어 짝하지 않는 자리(의두요목 6조)이다. 즉 일원상 이 자리로 자력을 양성하라는 것이다. 

일원상의 자력은 조건에 의한 것도 비교우위에 의한 것도 아니며, 우월하다거나 낮다는 분별이 떨어져야 드러나는 자리로, 상대와 비교 분별하는 순간 망각되는 것이다. 이렇게 상대심이 떨어져서 비교할 것이 없이 스스로 존귀할 때 온전한 자력이 세워지는 것이다. 이 같은 일원상 자리에서 자력을 양성할 때 의뢰생활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소태산은 “자력이 없는 어린이가 되든지, 노혼(老昏)한 늙은이가 되든지, 어찌할 수 없는 병든 이가 되든지 하면이어니와, 그렇지 아니한 바에는 자력을 공부삼아 양성하여 사람으로서 면할 수 없는 자기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동시에, 힘 미치는 대로는 자력 없는 사람에게 보호를 주자는 것이니라”라고 ‘자력양성의 강령’을 명시한다. 

‘사람으로서 면할 수 없는 자기의 의무와 책임’이 바로 자력양성이다. 무엇에도 침범 받고 조종될 수 없는 독존의 자력을 길러내는 것은 사람이라면 면할 수 없는 의무요 책임인 것이다. 이러한 독존의 일원상 자력으로 각자의 삶을 가꾸어가는 것이 떳떳하고 당당한 삶이라는 것이다.

그 실례로 양하운 사모가 회상을 창립하기까지 사가 일을 전담하여 갖은 수고와 고역을 다하는지라, 교도들이 이를 죄송히 여겨 거교적으로 성금을 모으려 하자 대종사 들으시고 “그 말도 예에는 그럴 듯하나 중지하라. 이만한 큰 회상을 창립하는데 그 사람도 직접 나서서 창립의 큰 인물은 못 될지언정 도리어 대중의 도움을 받아서야 되겠는가. 자력이 없어서 할 수 없는 처지라면 모르거니와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있다면 그것이 떳떳하고 행복한 생활이니라” (『대종경』 실시품 25장) 라고 말씀하신다. 양하운 사모마저도 어찌할 수 없이 의뢰해야 되는 처지가 아니라면 자력으로 생활하는 것이 떳떳하고 행복한 삶이라는 것이다. 

자력은 권리로, 자력이 서진 사람이라면 각자의 권리는 양도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한다. 이렇게 독존의 자력을 세운 사람들이 서로 연대·유대 하여, 자력이 미약한 사람들의 자력이 양성되도록 돕는 것이며, 자기의 고유한 자력이 있듯이 상대의 고유한 자력도 보호되도록 힘을 합하는 것이다. 이것이 ‘힘 미치는 대로 자력 없는 사람에게 보호를 주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존하는 자력을 양성하는 사람은 의뢰생활 하는 타력생활을 벗어나 정신·육신·경제 간에 자력생활을 하며, 타인의 자력이 침범당하는 것도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서로서로 자력생활을 하기 위해서 절대독존의 일원상에 기반한 자력을 길러내라는 것이다.

 /나주교당

[2020년 6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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