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익 원로교무
오광익 원로교무

[원불교신문=오광익 원로교무] 선을 닦는데 있어서 몸도 마음도 다 중요하지만 참으로 중요한 것은 단전(丹田)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단전은 육신의 중앙이요 천지 곧 우주의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을 닦는 것, 곧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 단전을 중앙으로 삼고 또한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 물론 수행하는 사람이 생이지지(生而知之)의 근기도 있기는 있겠지만 대개는 중하의 근기들이기 때문에 시간을 투자하여 고뇌(苦惱)하고 노신(勞身)하는 수행을 겪지 않고는 그 대결(大結)를 이루기가 어렵고 또한 대과(大果)도 따기가 어려움으로 여구두연(如救頭燃)의 심정으로 수행에 정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선을 닦을 것인가? 삼조(三調)를 해야 한다. 삼조란 조신(調身), 조식(調息), 조심(調心)을 말한다. 즉 조신은 수선(修禪)하는 자세를 좌변우변이나 앞뒤로 기우러짐이 없이 똑바로 직신(直身)을 하는 것이고, 조식은 수선할 때 날숨과 들숨의 장단지식(長短之息)에 헐떡거림이 없이 고르게 쉬자는 것이며, 조심은 수선하는 마음을 번뇌에 먹히거나 잡힘이 없이 맑고 고요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삼주(三住)를 해야 한다.

삼주란 신주(身住), 기주(氣住), 심주(心住)를 말한다. 신주란 온 몸의 중심이 바로 단전이기 때문에 여기에 머물도록 하자는 것이고, 기주란 전신의 기운뿐만 아니라 우주의 기운까지도 잡아다가 단전에 머물도록 하자는 것이며, 심주란 무란(無亂) 무비(無非) 무치(無癡)한 본래 청정한 마음을 단전에 머물도록 하자는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머문다는 의미는 유정(有定)의 머묾이 아니라 무정(無定)의 머묾이요, 유위(有爲)의 머묾이 아니라 무위(無爲)의 머묾이며, 유유(有留)의 머묾이 아니라 무유(無留)의 머묾이요, 유수(有修)의 머묾이 아니라 무수(無修)의 머묾이며, 유정(有靜)의 머묾이 아니라 무정(無靜)의 머묾이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자연 정(定)에 들게 되고 정에 들면 자연 지혜가 발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인정발혜(因定發慧)이다. 따라서 “작은 정은 작은 지혜가 발하고, 중간의 정은 중간의 지혜가 발하며, 큰 정은 큰 지혜가 발하고, 정에 듦이 없으면 지혜도 발하지 않게 된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심공을 드려 수행을 했는데도 지혜가 발하지 않는다면 이는 어딘가 잘못 된 수행을 하는 것이라 고 할 수 있을 것이니 참된 수행은 절대로 망령되거나 헛것이 아닌 참된 혜실(慧實)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송(頌)하기를  
수행지혜발(修行知慧發) 수행을 하면 지혜가 발하나니
입정최진방(入定最眞方) 정에 듦이 가장 참된 방법이라
보리인번출(菩提因煩出) 보리는 번뇌로 인하여 나오니
막수구뇌장(莫愁惱長) 많은 번뇌 자란다고 근심 말라.

/중앙남자원로수양원

[2020년 7월 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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