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길튼 교무
방길튼 교무

[원불교신문=방길튼 교무] 정전 정신수양의 목적은 “유정물(有情物)은 배우지 아니하되 근본적으로 알아지는 것과 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는데, 최령한 사람은 보고 듣고 배우고 하여 아는 것과 하고자 하는 것이 다른 동물의 몇 배 이상이 되므로”로 시작해 “천지만엽으로 벌여가는 이 욕심을 제거하고 온전한 정신을 얻어 자주력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니라”고 결론짓고 있다. 

‘아는 것’과 ‘하고자 하는 것’은 정신수양의 요지의 ‘분별성’ 및 ‘주착심’과 관련 된다. 분별성은 이것과 저것으로 나누어 좋아하고 싫어하는 차별상(相)을 내는 실체라면, 주착심은 이러한 차별상이 고착된 마음이다. 

인간은 보고 듣고 배우는 과정 속에서 그 아는 것과 하고자 하는 것이 다른 동물의 몇 배 이상이 되므로, 이를 취하려하면 그 아는 것에는 분별성이, 그 하고자 하는 것에는 주착심이 작동해, 예의염치와 공정한 법칙은 생각할 여유도 없이 자기에게 있는 권리와 기능과 무력을 다하여 욕심만 채우려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는 것과 하고자 하는 것에 여유가 없이 분별성과 주착심의 욕심에만 끌려 다니면 온갖 문제가 발생되므로, 정신수양이 더욱 요청되고 필요한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정신수양이 결여되어 욕심에 끌려 다니면, 결국은 가패신망(家敗身亡), 번민망상, 분심초려, 자포자기의 염세증, 신경쇠약자, 실진자, 자살자로 이어지는 파란고해가 펼쳐진다고 경계한다. 갖고 있는 권리와 기능과 무력인 물질의 세력에 끌려 욕심만 채우려 하다가는 물질의 노예가 되어 파란고해의 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욕심은 인간의 기본적인 에너지로 그 자체는 좋고 나쁜 것은 아니지만 정신수양이 결여된 욕심은 파란고해를 불러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권리와 기능과 무력으로 욕심만 채우려는 것은 물질의 노예생활이라면, 예의염치와 공정한 법칙을 생각할 여유가 있는 상태는 정신을 차린, 정신을 챙긴 상태이다. 

정신수양은 정신을 차려 안으로 분별성과 주착심을 없이 하며, 또한 정신을 챙겨 밖으로 산란하게 하는 욕심 경계에 끌리지 아니하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정신을 챙기면 수양의 여유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신수양을 소태산 대종사는 ‘정신을 정지하라’(송도성 수필)고 달리 말씀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아는 것과 하고자 하는 것에 따라 천지만엽으로 뻗어나가는 욕심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온전한 정신으로 욕심의 세력을 항복받는 자주력(自主力)을 양성해야 한다. 자주력은 욕심경계에 끌려가지 않는 마음의 힘이다. 욕심을 제거한다는 것은 욕심을 적대시 하거나 소멸시킨다는 것이 아니라 욕심인 줄 아는 깨어있는 마음이다. 

온전한 정신은 청정한 일원상의 발현으로, 일원상을 수행의 표본으로 삼아 마음이 두렷하고 고요하여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경지로, 욕심 경계에 물들지 않는 마음의 주인공인 자주력이 확보된 수양력의 경지이다.

[2020년 7월 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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