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길튼 교무
방길튼 교무

[원불교신문=방길튼 교무] 정전 ‘사리연구의 요지’에서 이(理)는 천조(天造)이며, 천조는 대·소·유무(大小有無)로, “대(大)라 함은 우주 만유의 본체를 이름이요, 소(小)라 함은 만상이 형형색색으로 구별되어 있음을 이름이요, 유무라 함은 천지의 춘·하·추·동 사시 순환과, 풍·운·우·로·상·설(風雲雨露霜雪)과 만물의 생·로·병·사와, 흥·망·성·쇠의 변태를 이름이며”라고 밝히고 있다.

결국 이(理)=천조(天造)=대·소·유무로, 대·소·유무는 소태산 대종사의 고유한 진리인식 방법이요 깨달음의 표현이다. 

대·소·유무의 이(理)는 ‘대소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에서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대소유무에 분별이 나타나는 것’으로, 대(大)는 청정한 성품 자리(性體)라면, 소(小)는 청정한 자리에서 드러나는 현상(性現)이며, 유무(有無)는 청정한 자리에서 변화하는 작용(性用)이다. 

대(大)가 만법으로 분별되기 이전 자리라면, 소(小)는 만법· 만상으로 드러남이요, 유무(有無)는 온갖 변태(變態)하는 변화 원리이다. 즉 대·소·유무의 이치는 일원상 성품의 발현이다.

청정한 대(大)자리를 여의지 않는 형형색색의 소(小)자리가 흥망성쇠로 유무(有無) 변태하므로, 소(小)의 변태가 유무이며, 유무 또한 대(大)를 여의지 않는 성품 자리에서 변태하는 작용이다. 대(大)자리에서 소와 유무가 드러나고, 소(小)가 드러난 자리가 대자리이고, 유무(有無) 변화로 작용하는 바탕이 대자리이다. 이처럼 대·소·유무는 위상의 차별이 없는 한 자리이다.

예를 들어 시비이해의 일을 대·소·유무로 살펴보면, 대(大)는 시비이해로 분별되기 이전 자리로 시비이해에 물들지 않는 자리라면, 소(小)는 청정한 자리에서 시비이해가 드러나는 자리로 판단하는 기준에 따라 선불선(善·不善)이 나누어지고 그에 따라 좋고 싫은 감정이 발생하여 개성·특성·차이·차별 등이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시비이해의 현상은 청정한 대(大) 자리에 바탕할 때 선명하게 자각되는 것으로,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언어명상이 완연하여 시방삼계가 장중의 한 구슬같이 드러나는 것이다.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두렷이 드러나는 것과 같다. 또한 유무(有無)는 은혜에서 해독으로 해독에서 은혜로 변태되는 변화의 흐름으로, 시비이해의 작용에 따른 변화 원리이다.

시비이해의 일은 형형색색의 소(小)자리이면서 유무(有無)로 변화하는 자리이며 또한 본체인 대(大)자리가 바탕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理)와 사(事)가 실상에 있어서는 둘이 아닌 것이다. 

이 세상은 대·소·유무의 이치로써 건설되고 시비이해의 일로써 운전해 가기 때문에, 사리연구는 일원상의 현현(顯現)인 대·소·유무의 이치에 근거하여 시비이해를 밝히는 것이다. 즉, 사리연구는 일원상의 발현인 대·소·유무의 이치를 연구해 이를 인간의 시비이해에 적용하여 밝게 분석하고 빠르게 판단해 가는 것이다.

/나주교당

[2020년 8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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