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윤 교무
현지윤 교무

[원불교신문=현지윤 교무] 1050. 이 숫자는 마지노선이다. 1050자에 맞춰 너무 모자라지도 많이 넘치지도 않는 글을 쓴다는 것, 쉽지 않음을 미처 몰랐다. 정기적으로 격식 갖춘 글을 쓴다는 것, 부담스러웠으나 인연이 닿으니…. 감사한 마음으로 일주일 내내 발원과 집중으로 해보지 싶었다. 하지만 여러 핑계로 미루다가, 개학 전 마지막 날 하는 방학 숙제처럼 위기의 순간이 여러 번 있었음을 고백한다. 한 글자도 주워 담을 수 없기에 소심하리만큼 신중해지고, 얕은 지혜가 매일 부끄럽다. 휴간(休刊), 일주일의 쉼은 더없는 홀가분함이더라. 

모파상이 전하는 ‘일물일어설(一物一語設)’. 프랑스 작가 플로베르는 제자 모파상에게, 온 세상에 완전히 똑같은 두 알의 모래나, 두 마리의 파리나, 두 개의 손이나, 두 개의 코가 없다는 진실을 말하고 나서 ‘어떤 인물이나 사물을 단 몇 줄의 문장으로 뚜렷이 개별화하고, 다른 인물이나 사물과 구별될 수 있도록 표현하라’라고 했다. 1050자의 짧은 분량이지만 분명한 메시지는 있어야 하기에, 단 한 글자도 낭비하거나 에둘러서는 안 된다는 말로 이해했다.

하지만 또 하나 부인할 수 없는 건 특정한 단어를 받아들이는 느낌이 저마다 조금씩 다르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런 뜻으로 썼는데 읽는 사람은 저런 뜻으로 받아들인다. 살아온 과거가 다르고, 현재가 다르기 때문이다. ‘꽃’이라고 말하면 저마다 꽃에 대한 추억과 인상이 다르기에, 똑같은 말도 사람에 따라 전달되는 내용이 다르다. ‘숲에서 바람이 살랑살랑 분다’라는 말에서 ‘살랑살랑’은 바람의 세기와 성질을 어느 정도 전달하지만, 그 바람을 개별화해주지는 않는다. ‘살랑살랑’을 쓸 수 있는 바람은 많지만, 글 쓴 사람이 표현하려고 하는 바람, 그 시간 그 숲에 불었던 바람은 유일한 바람이다. 똑같은 바람이 두 번 다시 불지 않는다. 읽는 이는 그 바람을 상상할 뿐이다. 

좋은 글을 쓰려면 많이 읽어야 한다. 쓰는 것과 읽는 것은, 분리되지 않는다. 읽지는 않고, 쓰기만 하는 사람은 없다. 읽었으니 쓰고, 쓰려면 읽어야 한다. 더불어 글을 읽는다는 건 자신이 가진 고정관념을 깨고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는 것이다. 세계를 보는 눈이 바뀌어야 행동이 달라지니깐. 그러기 위해 우리는 읽는다. ‘하늘 아래 책을 읽고 이치를 탐구하는 것처럼 아름답고 고귀한 일이 또 있겠는가?’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주도한 정조 대왕 말씀이다. 공부보다 더 귀한 일이 없단다. 기막힌 행운이란다. 

서울교구 재가·출가 동행프로그램, ‘손으로 쓰는 30일 법인기도, 대종경 사경’. 노트에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쓰다 보니 새삼 깨닫게 된다. 그토록 원대하고 그토록 심오한 진리가 그토록 평이하고 생생한 언어로 말해질 수 있다니…. 
나의 유일한 자부심은 길을 제대로 들어섰다는 사실 뿐이다. 

 /휘경여자중학교

[2020년 8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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