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길튼 교무
방길튼 교무

[원불교신문=방길튼 교무] 소태산 대종사는 ‘작업취사의 목적’에서 “우리는 정의 어든 기어이 취하고 불의 어든 기어이 버리는 실행 공부를 하여, 싫어하는 고해는 피하고 바라는 낙원을 맞아 오자는 것이니라”고 귀결하고 있다. 이처럼 정의는 낙원 인도의 정로(正路)라면 불의는 고해를 초래하므로, 정의는 취하고 불의는 버리는 작업취사의 실행공부는 파란고해의 일체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자는 ‘개교의 동기’의 실천방법이다.

소태산은 평탄한 낙원을 버리고 험악한 고해에 들게 되는 이유를 세 가지로 밝혀준다. 
첫째, 일에 당하여 시비를 몰라서 실행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육근을 작용할 때 옳고 그른 시비를 분석하고 판단하는 연구력이 부족하여 정의를 실행치 못한다는 것이다. 시비는 정의와 불의로, 정의는 정당한 고락이라면 불의는 부정당한 고락이다. 

둘째, 설사 시비는 안다 할지라도 불 같이 일어나는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욕심을 제어하는 수양력이 미약하기에 욕심의 세력에 끌리어 정당한 고락은 수용치 못하고 부정당한 고락에는 함몰되어 욕심의 노예가 된다는 것이다. 

셋째, 철석같이 굳은 습관에 끌리거나하여 악을 버리고 선을 취하는 실행이 없는 까닭이라는 것이다. 굳은 습관을 탈피하는 실행력이 확실치 않는 즉, 정당한 고락은 취하고 부정당한 고락은 버리는 데까지 실행력을 단련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수양과 연구로 취사하는 실행까지 해야 고해에 들지 않고 낙원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욕심에 물들지 않는 청정 일원상에 바탕해야 하며, 시비가 드러나는 명명한 일원상에 근원해야 하며, 습관 이전 자리인 본래중심의 일원상에 기반해야 하는 것이다. 

작업취사는 지공무사한 일원상을 수행의 표본으로 삼는 공부로, 정당한 고락은 지공무사한 일원상이 드러나는 정의요 낙원이라면, 부정당한 고락은 지공무사한 일원상이 결여된 불의요 고해이다. 일원상이 없는 정의는 작업취사의 정의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정의와 불의, 고해와 낙원의 기로에 작업취사 공부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낙이라 해도 그 낙이 부정당한 낙이라면 단호하게 끊는 결단력이 요구되며, 그 고가 아무리 힘들어도 정당한 고라면 달게 받아 승화해 가는 실행력이 요청된다. 정당한 고는 정당한 낙의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바라는 낙원과 피하고자 하는 고해의 갈림길에서 취사력이 작동되어야 한다. 고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고해를 초래하는 부정당한 고락을 사(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는 반복되기 때문이다. 정당한 고락인 정의는 일원상이 드러나는 것이며 부정당한 고락인 불의는 일원상이 가리거나 단절된 것이다. 지공무사한 일원상의 발현인 정당한 고락은 용맹있게 취하고 지공무사한 일원상이 가린 부정당한 고락은 용맹 있게 버리는 것이 작업취사의 핵심인 것이다.

/나주교당

[2020년 8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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