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보 교무
신은보 교무

[원불교신문=신은보 교무] 영산선학대학교로 발령을 받아 사령장을 받았을 때 교정원장의 직인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여느 임명장이나 사령장보다 월등한 직인의 크기만큼 교무라는 책임의 무게도 무거운 것이 사실이다. 느슨해진 사명의 끈을 다시 조일 때마다 이 사령장을 꺼내보곤 한다. 대종사 말씀만 듣고 첫 부임지로 떠났던 우리 선진들은 무엇을 열어보며 사명의 끈을 조였을까. 

원기4년 8월 21일(음 7. 26) 소태산 대종사는 제자 9명에게 사령장을 주기위한 준비를 한다.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백지의 사령장을 받아 든 제자들은 매우 당혹스러워 한다. 그러나 이내 대종사의 뜻을 헤아리고 스스로 사명을 다할 것이라는 약속의 다짐으로 각자의 사령장을 채우기 시작했다. 

‘사(死)·무(無)·여(餘)·한(恨): 죽어도 여한없이 이 회상 이 법에 사명을 다하겠습니다.’ 지금의 교정원장 직인이 크게 새겨진 그 곳에 자신들의 엄지를 꾹 꾹 눌러 이 마음을 잊지 않기로 재차 확인한다. 그리고 각자의 임지로 떠난다. 

다가오는 8월 21일, 100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선진들의 이 같은 신성이 우리에게 그리고 후진들에게 얼마나 전달되고 있을까. 그때의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리기 위해 A4 용지를 하나 꺼내 똑같이 적어 엄지손가락을 꾹 눌러본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약하게 눌렀나 싶어 조금 더 힘을 주어 눌러본다. 그러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나의 서원과 사명이 선진들의 그것과 같지 않아서일까? 아니다. 어떤 이적도 신비한 결과도 바라지 않았던 선진들의 서원에는 오직 한 마음 그 마음조차 놓아버린 빈 마음만 있었던 것이다. 진리와 간보기를 하며 계산하는 내 사령장에 붉은 법계 인증이란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대들이 지금까지 기도해 온 정성은 심히 장한 바 있으나, 나의 증험하는 바로는 아직도 천의(天意)를 움직이는 데는 그 거리가 먼 듯하니, 이는 그대들의 마음 가운데 아직도 어떠한 사념(私念)이 남아 있는 연고라, 그대들이 사실로 인류 세계를 위한다고 할진대, 그대들의 몸이 죽어 없어지더라도 우리의 정법이 세상에 드러나서 모든 창생이 도덕의 구원만 받는다면 조금도 여한 없이 그 일을 실행하겠는가?”(원불교 교사
제1편 개벽의 여명 제4장 회상 건설의 정초)

신은보! 그대의 마음에 아직도 어떠한 사념이 남아있는 연고라, 조금의 여한없이 이 일을 실행하겠는가! 대종사의 음성이 들린다. 우리는 이미 법계인증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다. 혈인 성사를 나툰 구인 선진들과 똑같은 이적을 나툴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대종사의 이 같은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선진들처럼 빠른 시일 내에 똑같은 이적을 나툴 수는 없지만 조금씩 천천히 인장의 붉은 색을 채워나갈 수는 있다. 다만 “네! 그러하겠습니다!”라는 확신에 찬 대답, 그러하겠다는 그 마음에 사념이 없는 오직 그 빈 마음, 그 대답만한다면 우리의 법계인증은 시작된 것이다. 

/영산선학대학교

[2020년 8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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