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윤 교무
현지윤 교무

[원불교신문=현지윤 교무] 대종사. 여러 사람이 다 각각 세상을 지도한다고 하나, 그중에 가장 덕이 많고 자비(慈悲)가 너른 인물이라야, 수많은 중생이 몸과 마음을 의지하여 다 같이 안락한 생활을 한다 했다. 자비는 엄밀히 말해 ‘자(慈)’와 ‘비(悲)’로 나눠 이해할 수 있다. 

자(慈)라 하는 것은 선량하고 기특한 중생을 보며 기뻐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 더욱 선도(善導)로 인도해 주는 것, 비(悲)는 탐욕 가득한 어리석은 중생을 보며 크게 불쌍히 여겨 천만 방편으로 제도(濟度)하는 것, 이것이 부처님의 대자대비다. 부처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는 태양보다 다습고 밝은 힘이 있어서, 자비가 미치는 곳에는 중생의 어리석은 마음이 녹아서 지혜로운 마음으로 변하며, 잔인한 마음이 녹아서 자비로운 마음으로 변하는 등 그 위력과 광명이 무엇으로 가히 비유할 수 없다고 했다.

자비를 섬세하게 구분한 대종사 말씀 중, 연민으로 번역한 비(悲)에 주목해 본다. 남의 불행을 차마 두고 보지 못하는 불인지심(不忍之心)과 사단(四端)은 맹자 사상의 핵심이다. 사단 가운데 남을 가엽게 여기는 측은지심. 측은지심이 바로 연민이며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다. 연민은 상대의 불행을 내 일처럼 받아들이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성정(性情)이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타인의 불행을 아파하는 마음을 연민’이라고 정의했다. 안타까운 처지에 있는 상대의 정서와 감정이 이입되어 눈물을 글썽이고 코끝이 찡해지는 마음이다. 

우리는 간혹 연민과 동정의 의미를 혼동한다. ‘너는 도움이 필요한 불쌍한 사람’이고, ‘나는 도울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분리하며, 돕고자 하는 마음을 ‘동정’이라고 한다. 동정심이 겉모습에 대해 가엾게 생각하는 마음이라면, 연민은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바탕에 있는 것이란다. 동정심과 달리 연민하는 마음은 분리되어 있던 모든 세포를 연결해 면역력이 생기게 한단다. 

끝내 불의한 사람은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자비일까. 정산종사는 불의한 사람을 아무리 타일러도 듣지 않으면 큰 경계를 써서 개과(改過)를 시키는 것도 ‘자비’란다. 선악을 불고하는 자비는 참 자비가 아니고, 죄고를 방지해 주는 것이 곧 활불의 자비라고. 단, 마음에 미워서 해할 마음이 있으면 자비가 아니란다. 자비란, 타인을 향해 보내는 사랑과 연민의 마음이지만 그 타인 속에 나의 모습이 그대로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자비심은 결국 나를 성숙하게 하는 마음이며, 둘로 나누어진 존재를 하나로 모아 커다란 시너지 효과를 내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너와 내가 분리된 남남이 아니라 똑같은 슬픔과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자비심은 커지기 마련이다. 위기 시대 함께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사랑과 연민에 대해….

/휘경여자중학교

[2020년 9월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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