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길튼 교무
방길튼 교무

[원불교신문=방길튼 교무] ‘사대강령’의 불법활용은 소태산 대종사의 대각에 의해 활용되는 불법으로, 소태산은 “이 부처 불(佛) 자라는 것은 각(覺)이라, 만법을 깬다는 뜻”으로 풀어준다. 즉 불법은 만법을 깨달도록 하는 마음공부법이다.

불법활용의 불법은 ‘재래의 불법’이 아니라 ‘미래의 불법’으로, 우주만유의 본원이요 제불제성의 심인인 법신불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모시는 불법이다. 역사상의 불법에 한정된 제도(制度)의 불법이 아니라, 물질이 개벽되는 미래시대에, 물질을 선용하는 정신개벽에 활용되는 불법이다. 즉 미래의 불법은 법신불 일원상을 체받아서 물질문명의 경계경계에 깨어있는 마음공부법이다. 

‘사대강령’의 불법활용은 “재래와 같이 불제자로서 불법에 끌려 세상일을 못할 것이 아니라 불제자가 됨으로써 세상일을 더 잘하자는 것”으로, 즉 깨어있는 수행법인 불법을 활용해 “개인·가정·사회·국가·세계에 도움을 주는 유용한 사람이 되자”는 것이다. 소태산은 “그대들은 마땅히 불법을 활용하여 생활의 향상을 도모할지언정 불법에 사로잡힌바 되어 일생을 헛되이 지내지 말라”(『대종경』 수행품 51장)고 당부한다. 진정한 불제자는 깨어있는 마음공부인 불법을 활용해 생활의 향상을 도모하는 공부인이다.

‘사대강령’의 ‘무아봉공’을 단락으로 구분하면, 무아(無我)는 ‘개인이나 자기 가족만을 위하려는 사상과 자유방종하는 행동을 버리고’라면, 봉공(奉公)은 ‘오직 이타적 대승행으로써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데 성심성의를 다 하자는 것’이라 대별할 수 있다. 

무아봉공은 자타가 없는 청정한 자리이기에 자타가 둘이 아닌 자리다. 그러므로 자타가 없는 무아요 자타가 둘이 아닌 대아(大我)로서, 나랄 것이 없는 무아의 자리가 큰 나이며 큰 집으로, 이 자리로 큰살림을 하는 것이 봉공이다.

다만, ‘사대강령’의 무아봉공은 단순히 나를 없애고 타인을 위해 희생하라는 것이 아니라, 나와 자기 가족만을 위한다든지 자유방종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나와 가족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하는 협소한 삶에서 나를 개방하는 열린 자세로,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해 서로 도움과 보호를 주고받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자는 것이다.

결국 무아는 자리(自利)의 자(自)를 없애라는 것이 아니라 이기(利己)의 기(己)를 없애라는 것이다. 자리의 자(自)를 세우는 동시에 이기의 기(己)를 버리어 봉공의 이타에 협력하고 연대하라는 것이다. 결국 무아는 자리(自利)와 상통하고 봉공은 이타(利他)에 연결되는 것이다. 

즉 무아봉공은 이타에 강조점을 둔 자리이타의 다른 표현이다. 나만을 위하는 이기주의도 남을 위해 희생하는 이타주의도 아닌 것이다. 이처럼 무아봉공은 역량만큼 힘을 다해 더불어 함께하는 소통의 길로, 소태산의 궁극 지향이다. 무아도 봉공도 지공무사한 일원상의 발현으로, 일원상으로 자리이타의 무아봉공 하라는 것이다.

 /나주교당

[2020년 9월 18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