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도 교무
권정도 교무

[원불교신문=권정도 교무] 정산종사법어 법훈편 19장에서는 “어떠한 사람이 눈이 밝은가 자기의 그름을 잘 살피는 이가 세상에 참으로 눈 밝은 이요, 어떠한 사람이 귀가 밝은가 알뜰한 충고 잘 듣는 이가 세상에 참으로 귀 밝은 이니라”라고 했다.

예로부터 세상에는 자신의 허물을 잘 살피고 그것을 쉽게 인정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 뿐이다’라는 명언을 남겼고, 공자(孔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라고 했다. 또 수심결(修心訣)에서는 ‘다만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견성(見性)’이라고 했다. 자신의 무지, 자신의 허물을 스스로 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지혜인지를 성자들이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모든 배움의 시작이요, 깨달음의 시작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것이 곧 부족한 자신을 드러내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잘 모르는 것도 아는 척 하거나, 조금 아는 것을 많이 아는 것처럼 부풀려 말하다가 낭패를 보는 일도 있다. 그리고 누군가 충고를 하면 자존심에 상처라도 나는 것처럼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충고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점점 무지함을 감춘 채 자신의 세계에만 집착하는 고집(固執)을 부린다.

필자는 학생들과 면담할 때 ‘뇌를 좀 말랑말랑하게 해보라’는 말을 하곤 한다. 생각의 유연성을 가지라는 말이다. 곧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 집착해서 스스로를 고립시키지 말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함으로써 자신의 생각도 많은 의견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각하라는 것이다. 

이처럼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자신의 주장과 고집을 내려놓을 때 가능하다. 그래서 정산종사는 ‘아상’이 사라진 사람이 자타를 초월해서 모든 시비를 바르게 볼 수 있다고 했다. 누군가 자신에게 따끔한 충고를 하거나 자신의 의견에 반대할 때,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는 저항감이나 불쾌감이 있다면 그 마음이 바로 자신에 대한 집착 곧 ‘아상’임을 알 필요가 있다. 따라서 사람들의 충고나 반대를 경청하는 것만으로도 ‘아상’ 떼는 공부는 시작되며, 그 사람은 어리석음을 벗어나 참 지혜를 얻게 될 것이다.

어른들이 사람을 평할 때 입이 큰 사람과 귀가 큰 사람을 말씀하곤 했다. 입이 큰 사람은 자기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요, 귀가 큰 사람은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다. 그런데 입이 큰 사람은 늘 외롭고, 귀가 큰 사람은 늘 사람들의 존중과 사랑을 받는다. 필자는 입이 큰 사람이었기에 늘 남 탓과 원망이 컸던 것 같다. 스스로를 낮추고 경청하는 것이 참 ‘견성’임을 알았으니 이제 실생활에서 스스로를 돌이켜 보며 ‘아상’ 떼는 공부를 실천해야겠다.

/영산선학대학교

[2020년 10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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