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오 교무
강신오 교무

[원불교신문=강신오 교무] “무엇이 고(苦)인가?” 라는 질문에 한 도반이 답했다. “이 몸이요.”그 후로도 교리를 연마하며 불교에서 말하는 고가 깊고 심오한 뜻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지만, 오히려 그 도반의 짧고 강렬한 답이 잊혀지지 않고 화두가 됐다. 

몸이 나라고 하는 생각은 물질이 개벽되면서 더욱 강해졌다. 자기 모습 그대로 사는 것이 마치 죄인 양, 누구나가 다 아름답고 멋있어야 하고, 유행은 따라가야만 할 것만 같다. 차를 사고 집을 사도, 그것을 사용하는 내가 기준이 아니라, 나를 보는 사람들의 나를 향한 가치 판단이 기준이 된다. 파란고해가 따로 없다. 

몸이 나라고 하는 생각은 왜 이토록 강렬한 것일까. 그것은 육신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DNA에 새겨온 것은 소속집단 내에서 사랑과 지지, 인정 등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집단 내에서 버림받아 야생으로 쫓겨나는 것은 즉, 죽음을 의미했다. 과학문명은 눈부시게 발달했지만, 인간의 깊은 무의식에 새겨진 생존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은 그러지 못했다. 어린 시절, 부모의 사랑과 지지를 받지 못한 아이가 크면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약이나, 게임, 술, 담배, 이성 등 다양한 중독에 빠지는 것이 한 예이다.

대종사는 ‘부모은’에서 몸은 ‘만사 만리의 근본’이라는 새로운 정의를 제시한다. 나는 내 몸 이상이라는 말이다. 눈을 통하지 않고 볼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지만 나는 내 눈이 아니다. 나는 육근을 통해 만사를 경험하고, 이를 통해 만리를 아는 더 큰 존재이다. 

‘나는 내 몸’이라고 하는 한계에서 벗어나면 보다 자유로울 수 있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도, 이 몸을 통해 ‘늙음’을 체험하는 것이다. 내 마음은 놀이터에서 어머니를 보고 웃던 4살이고, 낙엽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음이 터지던 17살인데, 나를 본 사람들은 나를 교무님, 혹은 아줌마라고 부른다. 재밌지 않은가. 나는 내 몸 이상이라는 것의 예이다.

그러면서 이치를 알아간다. 할머니가 왜 책을 눈에서 멀리 떨어뜨리고 봤는지 알아지고, 내 부모들도 나름 최선을 다했음이 알아지고, 연차수가 늘어가면서 선배들의 고마움을 알아간다.

대종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몸으로 실천해 마음으로 증득하라고 했다. 몸으로 실천해야 마음으로 증득하는 것이지, 보고 듣는 것만으로는 성불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경전을 읽고, 쓰고, 수없이 다양한 법문을 들은 들, 한 번이라도 내가 직접 깨어서 일원상과 같이 육근을 사용함만 못하다는 것이다. 

내가 저 미운 사람을 볼 때,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보는가. 볼 때와 안 볼때가 한결같은가.

끊임없이 육근을 가지고, 이 몸을 가지고 실험한다. 인간은 결국 자기가 체험하지 않으면 모르지 않는가.

/미주선학대학원대학교

[2021년 1월 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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