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오 교무
강신오 교무

[원불교신문=강신오 교무] 승산 양제승 종사를 보기 위해 원광효도병원에 간 일이 있다. 코로나로 인해 들어가지는 못하고, 병원 입구에 놓인 방문자 기록란에 이름을 적고, 옆에 있는 관계란에 ‘제자’라고 쓰고는, 설레는 마음으로 승산종사를 기다렸다. 

멀리서 휠체어를 탄 승산종사가 요양사의 도움을 받아 로비로 내려왔다. 미국으로 발령받은 후, 스승을 뵙지 못한 9년 세월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승산종사는 많이 야위어 있었다.

요양사가 승산종사와 어떻게 되냐고 관계를 물었다. 유리문 너머로도 한참은 더 떨어져 있기에 “제자에요” 하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랬더니 승산종사가 답을 한다. “스승 아니여! 도반이여!” 어리둥절해 있는 나에게 요양사가 웃으면서 말을 했다. “손님들이 와서 제자라고 하면, 모두에게 당신은 스승 아니고, 도반이라고 하세요.”

교역 평생 일원상을 가르치신 90이 한참 넘은 저 어른은, 새파랗게 어린 제자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기 위해 당신을 도반이라고 온 힘을 다해서 큰 소리로 대답해 준 것일까.

배냇골에서 향타원 박은국 종사를 17년 동안 모신 장덕훈 교무의 일화다. 

향타원종사를 가까이 모시며 깊이 얻은 바가 있어 마음에 스승으로 모신 그는, 하루는 마음을 먹고 향타원종사에게 ‘스승님’하고 불렀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향타원종사는 깜짝 놀라며, “‘스승’이라는 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의 스승은 대종사이시지, 나머지는 모두 도반이다. 나도 너에게 대종사 문하의 도반이니라”라고 했다고 한다.

소태산 대종사는 ‘지자 본위’에서 솔성의 도와 인사의 덕행뿐 아니라, 정사와 생활, 학문과 기술, 심지어 기타 모든 상식이 ‘자기 이상이 되고 보면 스승으로 알 것’이라고 하였고, 이를 근본적으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구하는 때에 있게 하자고 함으로써 우리에게 많은 스승을 주는 한편, 누구나 때에 따라 스승이 되는 길을 열어 주었다.

구하는 것이 있을 때, 지자를 스승으로 알고 배우라고 한 것은 많은 것을 내포한다. 스승으로 알라고 했지, 스승으로 부르라고 하지 않았다. 언어가 가진 한계는 공부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들에게 상(相)을 갖게 한다. ‘스승’이라고 불리우면 우쭐해져 공부가 고비를 넘지 못하고, ‘스승’으로 부르는 이들은 무리를 지어 다른 공부인들과 자신들을 구분 짓는다.

소태산 대종사는 대원정각을 하고도 ‘일원상 서원문’에 자신을 ‘우리 어리석은 중생’에 포함시켰다. 무슨 뜻일까. 매일 ‘일원상 서원문’을 외우며, 나는 과연 얼마나 소태산 대종사와 같아지려고 노력하였나 반성해 본다.

 ‘스승’이라는 말이 참 쉽게 들리는 요즘이다. 소태산 대종사를 조금이라도 닮게 되면 부를 수 있을까. ‘스승님’  참 그리운 날이다.

/미주선학대학원대학교

[2021년 1월 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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