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엽 교무
유정엽 교무

[원불교신문=유정엽 교무] 가끔 설교를 듣거나 글을 읽으며 교단의 수행과 문화에 대해 걱정이 되는 순간이 있다. 가령 마조의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는 일상 속에서 공부를 강조하는 법문으로 자주 인용된다. 그러나 사실 마조의 평상심은 그 반대의 의미이다. 마조는 모든 중생은 본래 부처이기에 육근동작과 일상생활이 모두 자성의 광명이라는 입장이다. 그러기에 나쁜 습관을 제거하고 마음을 전일 하게 만들려는 노력 즉 전통적인 수행을 일종의 조작 혹은 인위(人爲)로 보아 넘어서려 했다. 

그러한 자성과 수행에 대한 관점으로 ‘수행도 없고 증득도 없다(無修無證)’라고 까지 하며, 범(凡)과 성(聖)에 대한 분별마저 끊고 억지로 노력하지 않는 평상의 마음이 바로 진리라 말했다. 이렇게 자성을 절대 긍정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홍주종의 주장은 후일 많은 논쟁과 오해를 불러오고, 참회문에서 ‘스스로 이르기를 무애행이라 하여 불문을 더럽히는 일이 없지 아니하나니’라 하실 만큼 승려들 타락의 핑계가 되기도 했다. 

이사(理事)를 병행하는 우리의 수행전통 속에서 ‘평상심’은 충분한 이해와 해석 위에서 사용되고 있는가? 정산종사는 권도편(45·46·47)에서 평상심에 관해 다음과 같은 법문을 내렸다. 

“옛 선사의 말씀에 ‘평상심이 곧 도’라 하였나니, 평(平)은 고하의 계급과 물아(物我)의 차별이 없는 것이요, 상(常)은 고금의 간격과 유무의 변환이 끊어진 것이라, 이는 곧 우리의 자성을 가리킴이요 우리의 자성은 곧 우주의 대도니라.” 평(平)과 상(常)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으로 평상심이 곧 자성이며 조작도 시비도 취사도 단상도 없는 마음임을 분명히 설명했다. 

그러나 이에 그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이 평상의 진리만 분명히 해득한다면 곧 견성자이며 달도자라 할 것이나, 마음의 용처에 있어서는 설혹 그 진리를 다 깨닫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경우에 따라 능히 평상심을 실행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이 평상의 진리를 연구하는 동시에 또한 평상의 마음을 잘 운용하여야 할 것이니라.” 평상심을 정확히 이해하면서도 무사선(無事禪: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선)에 그치지 않고 현실 속에서 자신과 세계를 바꾸는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최상승의 가르침을 지금 이곳에서 구현하겠다는 ‘불법시생활 생활시불법’의 이상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한 번쯤은 ‘이사병행’에 대해 뒤돌아봐야 한다. 우리가 공부를 진정 이사병행으로 하고 있는가? 마조의 평상심이 후대에 타락의 핑계가 되었듯이 이사병행으로 우리의 나태를 가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앞에서 평상심에 대한 예를 들었지만 교단의 출판물을 보면 불교법문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인용하는 것을 종종 발견하며, 우리 교리에 대해서도 표준적인 해석과 다르게 설명하는 경우도 많다. 

더욱 문제는 그것을 지적하지도 않고 후에 수정되지도 않는 교단의 정서이다. 일상에서의 실천이 강조되면서 깊이 있는 경전의 이해나 사회에 샘물이 될 지혜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약해진 것이 아닐까? 이사병행을 표준으로 이루어진 교리와 제도이기 때문에, ‘사업’을 열심히 잘해서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면 ‘공부’도 저절로 높은 단계까지 오르게 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많은 재가출가 대중들이 속 시원한 사자후를 바라고 있는데 성리법회조차 제대로 열리지 못하는 현실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제도가 이사병행을 목적으로 한다면서 실제로는 ‘사업’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는 않은가 점검해야 한다. 정산종사는 평상심 법문을 일상 속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표준 잡아 주었으나 지극한 이치를 남김없이 드러냈다. 현재 우리 교단의 메시지가 일상 도덕의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나 반성이 필요하다.

/양평교당

[2021년 2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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