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오 교무
강신오 교무

[원불교신문=강신오 교무] 미주선대 기숙사에서는 총장인 김복인 교무부터 학생들까지, 몸이 안 좋거나 피치 못할 사정이 없는 한 누구나 식당 번을 한다. 목요일 아침 좌선을 마치고 식사 준비를 했다. 마음의 여유를 비집고 머릿속에 해야 할 일들이 들어온다. 이안봉불식 준비, 학생들 학자금 관련 업무, IRS 관련 각종 세금 보고 업무 등등. 손은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데, 마음은 어느새 사무실에 가서 해야 할 일들을 점검하고 순서를 정하고 있다.

계란 삶는 냄비를 옮기려고 손잡이를 잡았다. “앗, 뜨거워!”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방금 전까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일들이 끊어졌다. 손바닥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찬물을 틀어 손바닥을 댔다. 커다란 물집이 올라왔다. 엉뚱한 스토브를 켜놓아서 그 옆에 있던 냄비 손잡이가 뜨겁게 달구어진 것을 모르고 덥석 잡았던 것이다. 오늘따라 유난히 아침부터 주방에 들러서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 많다. 시끄럽고 분주한 주방 한가운데, 그러나 마음은 두렷하고 고요하다. ‘이 뭐꼬’ 무엇이 들어서 뜨거운 줄 알았는가. 무엇이 들어서 다친 손을 찬물로 이끌어 스스로 그 통증을 달랬는가.

우리의 ‘생각’은 생멸하는 물질이다. 그것이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가족이든 친구이든 원수이든, 물건이든 이념이든 상관없이, 모두 육근을 통해 들어온 감각을 바탕으로 한다. 내가 맛보지 않은 것은 그 맛을 알 수 없고, 보지 않은 사람은 알지 못한다. 짓지 않은 생각은 오지 않는 것과 같다. 일어난 것은 반드시 인과를 따라 변하고 마침내 사라진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나는 불생불멸해 두렷하고 고요하다. 손을 데이기 전에도 그러했고 데인 후에도 그러했다. 수십 년 전에도, 태어나기 전에도 그러했고, 지구가 생기기 전에도 그러했다. 내일도 그럴 것이고, 수십 년, 다음 생에도 오직 이뿐이다. 이 자리는 한 번도 지금 이 순간을 떠난 적이 없었다. 육근을 가지고 사는 우리들은, 그러나 보이는 무상의 세계에 집착되기가 쉽고, 혹은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유상의 세계에 치우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알아차리는 이 순간에는, 불생불멸한 자리와 인과보응되는 자리가 온전히 드러난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에 치여 우리가 몸을 받아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잊는다면, 일원상을 드러내는 것을 유념 삼아보자. 모두 ‘앗, 뜨거워’의 순간들이다. 꿈도 없이 잠을 자다가 알람을 듣고 일어날 때, 무엇이 들어 이 소리를 듣고 아는가, 누군가 나를 부를 때, 무엇이 들어 부르는 줄 알고 응하는가, 누군가 나를 화나고 짜증나게 했을 때, 무엇이 들어 이 감정을 알아차리는가, 배고플 때 무엇이 들어 배고픔을 알아차리고 이 몸을 먹이는가. 이 순간,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이 그대로 들어날 때, 온전히 응할 수 있다.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기에 온전히 볼 수 있고, 온전히 들을 수 있다. 지금, 무엇이 들어 이 글을 보고 아는가.

 /미주선학대학원대학교

[2021년 2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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