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오 교무
강신오 교무

[원불교신문=강신오 교무] 봄기운이 완연한 요즘이다. 아직 눈이 채 녹지 않은 동토를 뚫고 올라오는 새순들이 인사를 건넨다. 보면 늘 와사비가 생각나던 연두빛이 봄 생명의 향연과 대각지를 향해 가는 설레임이 된 것은 서울에서만 살다가 영산선학대학교로 편입하면서다. 

봄이 오기 전, 밭에 있는 돌을 주워 매년 한 트럭씩 버려도 큼지막한 돌들이 나왔다. 아무래도 영산은 하도 영험해서 돌이 돌을 낳는가보다는 우스갯소리가 돌기도 했다. 꽃이 봄에만 피는 것이 아님도 알게 됐다. 여자기숙사 원광원 앞, 이른 봄 꽃망울을 터뜨리는 매화를 보며 탄성을 지르기도 하고, 꽃이 피는 늦여름까지 열심히 따먹던 깻잎의 열매가 깨라는 사실을 처음 알고는 깜짝 놀란 모습이 도반들에게 두고두고 놀림꺼리가 되기도 했다. 잔잔한 미소가 나는 소중한 추억들이 많다. 

자연을 가까이 하면서 소태산 대종사의 게송을 함께 연마했다. 꽃이 피고 지고, 다시 피고 지고 하는 것이 유는 무로, 무는 유로 돌고 도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변하는 것이 무상하지만 그 가운데 열매도 있어지고 사람도 있어지고, 변하면서 생을 영속하니 구족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 공부를 하다가 성리품 31장을 보았다. ‘아뿔사!’ 무릎을 쳤다. 나는 소태산 대종사가 직접 설명한 것을 연마할 생각은 하지 않고, 다른 해석서들을 열심히 보며 그동안 내 마음대로 해석하고 그것이 맞다고 생각하며 세월을 지낸 것이다.
원기26년 1월, 대종사는 게송(偈頌)을 내리고 이야기한다.

“유(有)는 변하는 자리요 무(無)는 불변하는 자리나, 유라고도 할 수 없고 무라고도 할 수 없는 자리가 이 자리며, 돌고 돈다, 지극하다 하였으나 이도 또한 가르치기 위하여 강연히 표현한 말에 불과하나니, 구공이다, 구족하다를 논할 여지가 어디 있으리요. 이 자리가 곧 성품의 진체이니 사량으로 이 자리를 알아내려고 말고 관조로써 이 자리를 깨쳐 얻으라.”

유는 변하는 자리, 즉 인과보응되는 이치로 변하는 자리다. 꽃이 피고, 내가 태어나고, 감정이 일어나고 하는, 뭔가 물질이 있어지는 것이 유가 아니라, 그 물질이 인과보응의 이치를 따라 나고 죽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변하는 자리가 유이다.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대소유무의 분별이 나타나는 자리, 선악업보의 차별이 생겨나는 자리, 언어명상이 완연한 자리다.

무는 불변하는 자리, 즉 생멸 없는 도이다. 꽃이 지고, 내가 죽고, 감정이 사라지고 하는, 뭔가 물질이 사라지는 자리가 아니라, 물질이 인과따라 생멸하도록 그 바탕이 되는 불생불멸의 자리를 말한다. 대소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 생멸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 선악업보가 끊어진 자리, 언어명상이 돈공한 자리이다. 불생불멸은 인과보응을 통해 드러나고, 인과보응은 불생불멸이 있기에 가능하다. 둘은 한 번도 떨어진 적 없는 두렷한 일원상이다.

/미주선학대학원대학교

[2021년 4월 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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