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오 교무
강신오 교무

 

[원불교신문=강신오 교무] 고요한 마음으로 법문을 들으며 기숙사로 향하는 길. 신호를 기다려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빵! 하고 크랙션이 울렸다. 깜짝 놀라서 신호등을 보니 13초. 아직 10초도 더 남았다. 뒤로 등 가까이 검붉은색 차가 휙 하고 지나가는데, 두려움에 몸을 움추리며 운전자를 보니 흑인 여자다. 놀란 심장이 쿵쾅쿵쾅 거리는데 별의별 생각이 다 일어난다. 

‘경찰이 있었으면 저렇게 했을까? 내가 동양인 여자라서 만만해 보였나?’ 놀람과 두려움, 그것을 이겨내려는 저항으로 오만가지 생각을 이어가는 동안, 이어폰으로 전해지던 법문은 어느새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잡념을 끓이던 중, ‘저렇게 하니까 차별을 받지!’ 하는 생각이 났다. 화들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미국에서 동양인으로 차별받고 살면서 인종차별을 반대하던 내가 역경을 당하자 밑바닥에 숨겨놨던 인종차별적인 생각을 여과 없이 쏟아낸 것이다. 부끄러웠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자 운전자 한 사람 때문에, 흑인 전체를 매도하는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한다. 동양인이면 다들 쉬지 않고 일만 하고, 계산을 잘하고, 쿵푸를 할 줄 안다는 생각과 다를 것이 없다.

사람은 ‘나’라는 것이 있어, 그것을 지키기 위한 에고와 욕심경계로 인해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더 이로운 쪽에 끌리기 마련이다. 끌리면 착이 되고, 착되면 가리고, 가리면 어리석어진다. 그러면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지 못한다. 사실을 그대로 보지 못할 때 지은 업일지라도, 인과보응의 이치를 따라 호리도 틀림없이 받게 된다는 것은 무서운 사실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유는 무로 돌리고, 무는 유로 돌리라고 했다. 유는 변하는 자리, 무는 불변하는 자리다. 인과보응의 경계에서는 생멸 없는 도를 드러내고, 불생불멸의 경계에서는 인과보응의 이치를 드러낸다. 육근을 응용해 업을 지어 나아갈 때, 일원상을 드러내라는 것이다. 대종사는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을 함께 보아 이를 일러 법신불 사은이라고 했다.

두려움과 분노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 바탕은 본래 청정하고 고요해서 한 번도 인과보응을 떠난 적이 없었다. 생겨난 것은 반드시 사라지게 마련이다. 쿵쾅거리던 심장도 천천히 본래 속도를 찾아갔다. 마음이 고요하고 청정하니, 사실이 사실 그대로 보인다. 그러자 중도를 찾아가는 지혜로운 생각들이 올라온다. 우체국에서 영어를 못 알아듣는다고 나에게 소리를 지르던 백인 남자, 내가 길을 건널 수 있도록 미소지으며 차를 세워 기다려준 흑인 남자, 그러고 보니 내가 존경하는 기품있는 교수님도 흑인 여자다.
변하는 자리에서는 없는 자리를 여의지 않고, 없는 자리에서는 변하는 자리를 여의지 않는 공부를 하고 하고 또 해 일원상을 드러내면 나와 상대를 구분하는 은산철벽같던 상들이 다 공하여 원래 한 몸으로 은혜다. 참 지혜는 하나일 때 은혜로 나온다.

/미주선학대학원대학교

[2021년 4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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