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오 교무
강신오 교무

[원불교신문=강신오 교무] 교당 교무님과 차를 타고 학교로 가는 길. 앞 차의 번호판이 ‘0428’이다. 반가운 마음에 교무님에게 말을 걸었다.

“교무님, 우와~ 앞에 차 번호판 봐요. 대각개교절이다!”
그런데 교무님 표정이 그저 그렇다. “어디요?”
앞차를 가리키며 ‘4월 28일!’ 하려는데, 다시 보니 ‘0482’다. 왜 저 번호를 0428로 봤을까. 

광고 시안을 검토하는 시간, 한 분이 이메일 주소의 철자가 잘못됐다고 수정해달라고 요청을 했다. 아무리 봐도 맞는 철자였다. 내가 잘못 봤나 싶었는데, 다른 분들도 전부 이메일 주소가 맞게 써졌다고 했다. 디자이너가 주소 부분을 크게 확대를 해서 보여줬지만 석연치 못한 분위기다.

인연 관계 속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직접 보거나 직접 경험하지 않는 이상에는 섣불리 믿지 않기를 주의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육근을 통해 직접 보고 경험하는 것도 얼마나 불완전한가. 원불교라는 인연이 0482라는 번호판을 0428로 보게 만들고, 대각개교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업을 짓게 하고, 한 번 잘못 읽힌 주소는 아무리 다시 보아도 여전히 틀린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이만하면 다행이다. 같은 말을 듣고도 다르게 들어서 생기는 오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소통이 안되는 한국 사람보다 영어는 부족해도 서로 소통이 되는 미국 사람에게 더 신뢰가 가는 것을 보면, 분명 언어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강하게 인상이 된 마음의 필터는 그 힘이 더하다. 미운 사람은 무슨 짓을 해도 미워 보인다. 반대로 예쁜 사람은 무슨 짓을 해도 예쁘다. 그렇게 가려서 착이 된 마음은 어리석은 말과 행동으로 나오기 마련이라, 그 어리석음으로 다음 업을 짓는다.

우리는 몸을 받은 이상 업을 짓지 않을 수 없다. 육근으로 작용하는 바가 모두 업을 짓는 ‘작업(作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과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지은 업은 인과보응의 이치를 따라 소소영령하게 호리도 틀림없이 나타난다. 나에게 미운 짓을 해서 미워보이고, 예쁜 짓을 하니까 예뻐 보이는 것이 인과의 이치다.

지혜롭게 업을 지으려면 먼저 그대로 봐야 한다. 지금 있는 그대로 보려면 마음에 먼저 일원상을 드러내야 한다. 

청정하고 고요한 마음. 예쁘고 밉고, 좋고 나쁘고 하는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마음이 드러나면, 허공에 들어 올린 내 손이 그대로 보이듯이, 저 대상도 그대로 보인다.

내 앞에 펼쳐진 인과를 알아차린 지금, 공부할 때가 돌아온 줄로 알아보자. 마음에 일원상을 드러내 일원상으로 인과를 지어나갈 것인가, 아니면 나의 시비 이해에 가려서 욕망에 따라 인과를 지어나갈 것인가는 내 마음에 달렸다.

/미주선학대학원대학교

[2021년 4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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