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엽 교무
유정엽 교무

[원불교신문=유정엽 교무] 육조단경의 다섯 가지 판본 중 가장 초기의 것은 돈황본이며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덕이본이다. 두가지 판본을 비교하며 읽으면 선종(禪宗)의 메시지와 발전 방향이 보이기도 한다. 가령 돈황본에서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늙은 어머니를 모시던 혜능대사는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고 숙세의 업연이 있어 곧 어머니를 하직하고 오조 홍인화상을 찾아 예배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덕이본에서는 노모의 옷과 양식을 충당하여 편안하게 모신 뒤 출가를 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중국에서 중시하는 효(孝)에 대한 덕목과 어긋나지 않도록 메시지를 수정한 것이다. 이런 변화는 혜능의 전법게에서도 찾을 수 있다.

돈황본의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명경의 역시 받침이 없다 불성은 항상 청정하거늘 어디에 티끌이 있으리오 마음은 보리의 나무요 몸은 명경의 받침이 되니 명경은 본래 청정한 것이요 어디에 티끌과 먼지에 물들겠소”라는 게송이 덕이본에서는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명경은 역시 받침이 없다 본래 한물건도 없는 것이어늘 어느 곳에 물듬이 있으리오”라는 게송으로 바뀌어 전해진다. 

두 게송 모두 우리의 본래면목인 자성은 청정한 것으로 번뇌에 오염될 수 없다는 메시지는 같으나, ‘불성상청정(佛性常淸淨)’이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로 바뀌고 또 한구로 합쳐진 것이다. 불성사상과 본래 한 물건도 없다는 공사상(空思想)이 다른 것은 아니지만, 선종이 공과 무념(無念)을 중시하며 사상적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조주의 ‘방하착’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느 날 엄양스님이 조주선사에게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을 때는 어찌합니까?(一物不將來時 如何)”라고 묻자 조주선사는 “내려놓으라(放下着)”고 답한다. 엄양선사가 다시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무엇을 내려놓으라는 말씀인가요?”라고 묻자 조주선사는 바로 “그럼 들고 있던지(着得去)”라고 답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방하착은 모든 분별과 집착을 내려 놓으라는 의미이다. 엄양이 말했던 일물부장래시(一物不將來時)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과 상통하는 법어이다. 조주가 내려 놓으라 했던 분별과 집착에는 지금까지 발전시켜 왔던 선종의 사상마저 포함되는 것이다. 이렇게 어제의 자신마저 부정하고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 선종의 매력이며, 지금까지 당송시대 조사의 메시지에 머물러 있는 것은 선종의 비극일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 역시 선종의 위대한 지혜를 계승하시되 넘어서려 하셨다. 문자선(文字禪)이나 무사선(無事禪)을 넘어 땀 흘리는 사람의 선·낙원 세상을 만드는 선으로까지 확장하신 것이다. 선의 본질을 메시지 보다 그 메시지를 넘는 지점에서 찾을 수 있듯이, 소태산 대종사의 교리와 함께 그분의 행(行)하신 바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의 가르침이 아직도 새로운가? 창립이후 시간상으로는 백 년에 그치지만, 사회제도와 삶의 변화는 과거 천년의 변화이상 바뀌었다. 

우리는 변화에 적응하며 현실의 문제점을 해결 할 지혜와 비전 제시하고 있는가? 삼동윤리 이후 새로운 교리라고 할 만한 가르침이 등장하지 않고 있다. 정산종사가 무본편 57장에서 법문한 세 딸의 비유는 ‘스승의 가르침을 어떻게 전하고 있는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소비하고 있는가? 지키고 있는가? 발전시키고 있는가? 문제는 종자를 키우는 것과 달리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소태산 대종사와 조주선사처럼 과거의 가르침을 극복하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처럼 계승하되 초월한다면 그분의 삶과 행(行)을 가장 잘 따라한 것이 아닐까?

/양평교당

[2021년 5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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