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오 교무
강신오 교무

[원불교신문=강신오 교무] 팬데믹 전, 학교 근무를 마치고 이따금 가던 피트니스에서 한 여성분이 말을 걸었다. “한국분이세요?”

학교가 있는 몽고메리 카운티에는 유난히 보수적인 한국 기독교인들이 많다. 처음에는 모르고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반갑게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내가 원불교 교무라는 것을 알면 그때부터 지옥에 갈 거라는 등 대화가 이상해졌다. 기억이 떠오르며, 불필요한 대화는 굳이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짧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니나 다를까 종교를 묻는다. “저는 원불교 교무에요.”

그랬더니 이 분이 안심이라며, 부모님이 불교 신자인데 이 동네에서 불교 신도들을 찾기가 어렵다고 반갑다며 말을 이어갔고, 그렇게 피트니스에서 보면 인사하는 사이가 됐다.

팬데믹이 벌어졌고, 식료품점과 주유소, 은행을 제외한 모든 곳이 문을 닫았다. 이 분과도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러다가 얼마 전 14개월 만에 처음으로 만났다.

“신오씨! 반가워요!” 인사를 하는데 뭔가 어색하다. ‘아, 교무님이라고 안 불러서 그랬구나.’ 웃음이 났다. 팬데믹 기간 동안 만나고 혹은 연락하던 사람들이란 온통 학교와 기숙사 식구들, 우리 교도님들이 전부였다.

사람으로 태어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나를 다른 이들과 구분 짓기 위한 이름이 필요하다. 그래서 처음에는 타인과 나를 구분 짓기 위한 이름을 받는다. 그러다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소속 집단에서의 역할과 지위가 생겨나고, 그에 따른 또 다른 이름들을 받는다. 이런 이름들은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난 것이 아니다. 나에게 붙여진 것, 새로 생겨난 것이다. 이름들은 가지고 있는 동안 각기 다른 힘을 지닌다. 이것이 영원할 줄 알고 집착하면 그 때부터 어리석어지고 고통스러워진다. 생겨난 것은 반드시 변하고, 마침내 그것이 있기 전 자리로 가기 때문이다.

원불교인들이 ‘신오 교무님’이라고 부르던, 미국인 직원들이 ‘쒸인노오’라고 부르던, 동생이 ‘누나’라고 부르던, 원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이 ‘신오 씨’라고 부르던, 그것은 그냥 이름일 뿐이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다 다른 사람인 줄 알 것이고, 아는 사람이 들으면 다 같은 사람인 줄 안다.

일원은 일원상이다. 일원상은 일원이다. 이 둘이 같은 줄을 알았기에, 대종사는 『정전』과 『대종경』에서 일원과 일원상을 걸림 없이 하나로 사용했다. 짧은 예를 들어보자. 정전을 열면 일원상이 나오고 이어 표어들이 나온 뒤에 교리도가 나온다. 일원상을 정의하는 교리도의 그 첫 시작을 대종사는 ‘일원은 법신불이니’하고 시작한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교법이 시작하는 교의편에서는 제1장 ‘일원’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일원상’이다. 그리고 제1절 일원상의 진리는 ‘일원은 우주만유의 본원이며’하고 시작한다. 일원과 일원상은 같은 말이다. 본질을 알면 다 같은 줄 안다.

/미주선학대학원대학교

[2021년 6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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