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익선 교무/원광대학교
원익선 교무/원광대학교

[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근대 한국불교의 역사적 과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독립운동, 또 하나는 불교개혁이다. 후자의 입장에서 불교계는 근대화를 위한 불교개혁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 운동이 줄을 이었다. 한용운의 『조선불교 개혁안』과 『조선불교유신론』, 소태산 대종사의 『조선불교혁신론』과 불법연구회, 백용성의 대각교 운동, 박한영의 『조선불교현대화론』, 이영재의 『조선불교혁신론』, 백용성의 대각교 운동을 비롯한 불교계의 임제종 운동 등이 등장했다. 

1913년에 간행된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 17장은 전 불교도에 대해 결사를 촉구하는 글과도 같다. 그는 불교가 미래사회와 인류문명에 손색이 없으며, 그 사상을 평등주의와 구세주의로 본다. 그리고 유신은 구습을 파괴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라고 외친다. 선학관(禪學館) 설립, 염불당 폐지, 소상(塑像, 진흙 불상)과 소회(塑繪, 등상과 불화) 철폐, 석가모니불 1불 숭배, 성현들을 모시는 큰 기념관 설치, 의식절차의 개혁과 승려의 결혼 장려 등을 주장한다. 

조선불교의 혁신을 외친, 1935년도에 나온 소태산 대종사의 『조선불교혁신론』 9장은 한용운이 주장하는 것과 내용상 일맥상통한다. 특히 마지막에 불성 일원상 조성 주장은 새로운 불교교단, 새로운 종교를 펼쳐 불법을 더욱 빛내겠다는 소태산 대종사의 의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실제 이 내용들은 불법연구회와 원불교를 통해 구현됐다. 그렇다면 한용운의 개혁론도 원불교에 와서 거의 실현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왜 불교학자들이 “원불교는 근대 불교개혁의 완성”이라고 말하는 지를 알 수 있다. 

중국 근대불교의 아버지 양문회는 1866년 경전 편찬을 위한 금릉각경처(金陵刻經處), 불교학교인 기원정사(祇園精舍), 불교연구를 위한 불학연구회를 개설했다. 중국 근대불교의 새로운 출발이었다. 그곳에서 배출된 승려들과 거사들은 중국 근대불교의 주역들이 됐다. 특히 인간불교를 제창한 태허(太虛)법사의 정신은 오늘날 중국과 대만불교계에 계승돼 흐르고 있다.

1868년 메이지 유신에 의해 폐불훼석(廢佛毁釋)의 타격을 받은 일본은 다음 해에 일본 최초로 모든 종파가 참여하는 제종회맹(諸宗會盟)이 결성됐다. 불교개혁을 위한 8개조를 합의해 근대불교 개혁의 길을 열었다. 그 중에는 자종(自宗)의 교의경전 연구, 자종의 폐해 일신, 신규학교 경영과 인재 양성, 각종(各宗)의 영재등용, 민중교화의 노력들이 들어 있다. 이를 불교계는 새로운 약진의 발판을 삼았다. 내부로는 서양 학문을 수입, 불교학과 교육 체계가 확립되고, 외부로는 불교개혁과 불법의 사회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난다. 

결국 불법연구회는 이처럼 근대 동아시아의 거대한 불교개혁의 흐름과 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광대학교

[2021년 6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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