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오 교무
강신오 교무

[원불교신문=강신오 교무] 몇 년 전, 선 공부에 목이 마르다는 생각이 들던 차에, 마침 한 단체에서 10일 위빠사나 집중 선 훈련이 있다고 해 경험도 할 겸 참가했다. 선객들은 시작부터 마지막 날 아침까지 묵언 수행을 했다. 새벽 4시 반부터 선을 했다. 외부와의 일체 접촉에서 벗어나, 봉사자들의 공양을 받으며 오직 선만 했다. 이 훈련을 보급한 사람의 간절한 뜻으로 선객들은 오직 심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데 집중함으로써 사성제를 깨치면 됐다.

훈련 마지막 날이 됐다. 모두가 침묵하는 고요한 가운데 분별없는 하나의 체험만 남자, 나를 생존케 하는 법신불 일원상, 그 크신 은혜가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다. 은혜 가득한 마음으로 해제시간을 맞이했다. 내 쪽 테이블에는 인도에서 온 듯한 세 분이 앉아있었다. 묵언을 마친다는 진행자의 말에 따라 우리는 밝게 웃으며 서로 인사를 했다.

그런데, 자기소개를 하며 이름이 나오기가 무섭게, 그 셋은 나는 브라만이네, 너는 바이샤네 하며 인도에 살았던 각자의 조상들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떻게 계급을 알았냐고 물으니 이름의 성과 피부색을 보면 안다고 한다. 세 사람 사이에 묘하게 계급이 나뉘었다. 바이샤 계급의 두 사람은 브라만의 비위를 맞추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열흘간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두렷하고 고요한 불생불멸의 자리를 단련해놓고, 묵언을 풀고 말을 하게 되면서 언어명상이 완연해지자 순식간에 분별과 차별의 세계로 떨어진다. 그 모습을 보는데, 너무나도 여실하게 내 마음속을 보는 것 같았다. 내 안에는 또 얼마나 많은 분별 주착과 차별이 있는가. 당장 한국인이 없어서 그랬지, 한국인이 있었다면, 서로 대화를 하면서 지역과 학벌, 직장, 종교 등으로 가지가지 차별을 지어냈을 것이다. 

그날 마침표를 하나 찍었다. 정기와 상시로 일원상을 신앙하고 수행하는 우리 공부가 정말 원만하고 큰 법이구나 하고 말이다. 내가 이 법을 몰랐다면, 정기훈련만 훈련인 줄 알고, 생활이야 어찌됐든 훈련 기간에 선 잘한 것으로 공부를 잘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혹은 선하면서 겪은 특별한 체험에 매달려 우월감을 갖거나 혹은 나보다 더 특별한 체험을 한 사람에게는 열등감을 느끼며 상대심 속에 수행했을 것이다. 생멸하는 체험에 매달리니 공부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정기훈련을 통해 삼대력을 기르며 마음 깊은 곳 분별성과 주착심을 알아 감정을 받으며 공부길을 잡는다. 그리고 이를 상시에 가져가 실생활에서 경계에 직접 부딪혀 일원상을 신앙하고 수행해간다. 정할 때나 동할 때나 늘 공부이다. 이 법이 아니었다면 어찌 일원상의 진리를 알았으며, 어찌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을 함께 보고, 성불의 희망을 갖겠는가. 어찌 다행 이 법을 만났을까. 대종사님 감사합니다.

 /미주선학대학원대학교

[2021년 7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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