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엽 교무
유정엽 교무

[원불교신문=유정엽 교무] 아주 예전에 학술대회 뒤풀이 자리에서 우연히 외부의 불교학자와 이야기를 나눴다. 첫 번째 질문은 불생불멸을 설하는 용수의 논리가 학계의 찬탄과 달리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제논의 역설(逆說) 수준의 논리라는 고민이었다. 기꺼이 동의해 주었다.

두 번째는 남송시대 선종의 선문답은 새로운 깨달음 보다는 미학(美學)적 성취에 가까운 것 같다는 질문이었다. 그분은  일종의 수사학이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해주었다. 마지막은 불교철학의 한계에 대한 질문이었다. 불교가 본질적으로 문제의 해결은 진공(眞空)의 평등성에 기대고 가치의 창조는 기어를 바꾸어 묘유(妙有)에서 해결하는 방식의 구조로 되어 있고, 그러한 방식은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가치의 충돌을 해결하기에는 어렵지 않으냐는 질문이었다. 

무모하고 도발적인 질문이었는데도 깊이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말해 주었다. 옆자리에 그 모습을 지켜본 도공 교무는 ‘괴각(乖角)답게 인가(認可)도 참 특이하게 받는다’라며 놀리었다. 줄탁동시라는 말처럼 가르침이 아니라 인정만으로도 껍질을 벗고 한 단계 올라선 기분이었다. 불교학을 공부해서 불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한 달 뒤로 다가온 법인절을 앞두고 ‘법계(法界)의 인증(認證)’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곳 양평에 와서 교단 외부의 사람들과 접할 기회가 많다. 그분들이 수행에 대해 가지는 이미지는 주로 ‘욕망과 싸움’이었다. 당연히 욕망과 싸우는 길이지만, 수행은 오히려 무한하게 일상성과 싸워야 하고 혹은 회의와 싸워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대부분 사람이 드라마와 같이 역동적인 삶을 살지 않듯이, 남들에게는 특이한 아침좌선도 교무에게는 몇십 년간 되풀이되는 일과이다. 도신대사는 『최상승론』에서 오늘 하루뿐이라는 다짐으로 좌선을 하라 한 것은, 수행을 한다며 일상성에 빠지기 쉬운 점을 경계한 법문일 것이다. 반복을 넘어 늘 새로워야 수행이다. 또 일상의 함정보다 더 수도인을 괴롭히는 것은 의심일 것이다. 

염불 한마디 좌선 한 번에 마음이 커진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무한에 가까운 시간을 투자해야 조금씩 좋은 사람이 될 뿐이다. 그때마다 ‘정말 내가 성불할 수 있을까?’ ‘나는 바른 수행을 하고 있는가?’ 라며 자신과 수행길에 대한 불신(不信)의 마음이 일어나곤 한다. 

거기에 더해 근래에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사건은 우리 교단과 교단의 미래에 대한 의심까지 들게 한다. 초창기 선진님들은 어떠했을까? 지금의 교단과는 다르게 길룡리라는 벽촌(僻村)에서도 소수의 사람들이었다. 큰 깨달음을 얻은 스승님이 있지만 아직 세상이 알아주지도 않은 홍안의 청년이으며, 함께 시작한 방언공사는 주변의 비웃음거리였고 그마저도 소유권에 대한 소송이 진행되었다. 

우리가 혈심혈성(血心血誠)이라고 그분들의 신성과 노력에 대해 표현하지만, 수행인으로 의심도 있으셨을 것이고 교단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있으셨을 것이다. 백지혈인(白指血印)은 그분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대화를 통해 오랜 고민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인정만으로도 한걸음 크게 나갈 수 있었던 개인적 경험으로 볼 때, 아마도 법계의 인증은 선진님들의 기도와 노력에 대한 더할 수 없는 보상이었으며 모든 회의를 벗어버리고 창생을 제도하는 한 길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재가출가 교도 모두 교단에 대한 걱정과 회의가 깊어지고 있는 요즈음, 우리의 출발이 중생을 위한 사무여한(死無餘恨)의 정신이었고 그를 통해 법계의 인증을 받았음을 기억하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를 기도한다.

 /양평교당

[2021년 7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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