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엽 교무
유정엽 교무

[원불교신문=유정엽 교무] 중학생 때 볼펜을 돌리는 버릇을 유무념을 통해 일주일 만에 고쳤다. 어린 마음에도 이 정도의 가르침이라면 인생을 걸만하다는 생각이 들어 출가를 결심할 수 있었다. 후에 원불교학과에 입학해 체계적으로 교리와 선(禪)에 대해서 배우며 유무념이 일상의 작은 실천에서 출발해 육조단경의 무념(無念)과 마조의 평상심(平常心)까지도 아우르는 공부(경의편 23~27)임을 알게 됐다. 부족한 정성과 근기로 큰 도인이 되지는 못했지만 소태산 대종사가 새롭게 편 우리의 공부법이 새 시대에 어울리는 최상승의 수행길이라 믿고 있다.

이렇게 실질적으로 기질을 단련하고 가정과 사회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훈련법은 전산종법사가 말씀한 것처럼 원불교 수행의 백미라고 할 것이다. 일기·상시응용 주의사항·문답감정의 공부가 강조되고 교화단과 훈련법을 중심으로 하는 수행이 새로운 경향이 되고 있지만, 그에 따라 삼학과 무시선 같은 우리 수행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실천이 약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고 있다. 실제로 원불교 신문이나 원광과 같은 교단의 출판물에서 항상 보이던 ‘삼학병진’,‘무시선’등의 단어를 이제는 찾기 어려울 정도가 됐다.

누군가는 훈련법의 수행론적 위상에 대해 ‘삼학과 무시선은 이론이고 구체적인 실천방법이 훈련법’이라고 주장하지만 동의하지 않는다. 삼학은 온 천하의 사람이 다 알고 실행해야 하는 실천(교의품 2)이라고 한 말씀처럼 본격적인 실천에 대한 이론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수행품 16장에서 공부를 그 특성에 따라 대해 두가지로 나누어서 말씀했다. ‘기질(氣質)의 수양’과 ‘심성(心性)의 수양’이다. 심성의 수양은 오욕의 경계 중에서 마군(魔軍)을 항복 받는 수도인의 공부로, 기질의 수양은 실지 전쟁에서 마음을 단련하는 군인의 공부로 설명했다. 과거 도가의 공부가 심성의 수양에만 치우쳤기에 기질의 수양을 겸해 우리의 공부를 영육쌍전(靈肉雙全)의 공부로 만들려고 한 것이다. 훈련법을 정의하고 설명하는 데 있어 늘 등장하는 것이 ‘기질을 단련하고 체화시키는 공부’라는 표현이다. 삼학이 심성의 수양이라면, 훈련법은 기질의 수양이라 봐야 할 것이다. 

무시선과 훈련법의 관계에 대해서 ‘돈점(頓漸)’의 관점을 적용할 필요도 있다. 소태산 대종사는 불법이 모든 교법중에 뛰어난 바가 있다고 하며 그 이유중에 수행의 큰 길을 갖춘 것을 말씀 했는데, 주로 남종돈오선법을 중심으로 하는 선종이 대상인 것으로 보인다. 꾸어서라도 갖추라 하신 성리(性理)는 조사선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정산종사도 무념의 선을 ‘공부의 진실처’(경의편 25)라 하며 돈오(頓悟)의 선을 최고의 공부로 인정했다. 그러나 또한 ‘대종사의 법은 수상문(隨相門)과 자성문(自性門)을 중간 잡아 놓으셨다’라고 한 말씀처럼 점수(漸修)의 공부를 하열한 근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바꾸는 중요한 실천으로 중시여겼다. 

‘마음을 알아서 마음의 자유를 얻는다’는 무시선이 돈오의 전통을 계승한다면 훈련법은 점수의 재발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점수가 우리의 특징이 아니라 돈(頓)과 점(漸)을 아우르는 것이 우리의 특징인 것이다. 쓸데없는 걱정인지는 모르겠지만 훈련법을 강조하는데 비해 한 마음(自性)에 근원한 선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점점 약해지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훈련법의 강조는 오히려 수행론의 퇴행이 될 것이다. 

요즈음 원불교의 공부는 ‘오래오래 계속하는 것’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계단을 초월하여(원리편 2)’ 성취한 것도 우리의 공부이다. 현실 속 실천에도 얽매이지 않아야  쌍전(雙全)과 병행(竝行)이다.

/양평교당

[2021년 9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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