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오 교무
강신오 교무

[원불교신문=강신오 교무] 핸드폰으로 이런저런 뉴스를 보다가 ‘유익한 벌레들’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열었다. 기사가 열리는 순간, 그리마라는 다리가 많이 달린 커다란 돈벌레 사진이 나왔다. 순간 놀라서 차마 손가락을 핸드폰 화면에 올리지 못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 기사를 본다, 문자를 보낸다며 만지고, 전화를 하며 얼굴에 대던 핸드폰 화면인데, 돈벌레 사진 하나 화면에 떠있다고 내 마음은 왜 이렇게 다를까?

아침식사를 하며 회화를 하는 중에 한 교무님이 무엇을 물어봤다. 잘 모르겠기에 모르겠다고 답을 했더니, “어머, 신오 교무, 어디 대학 나와서 똑똑한 줄 알았더니, 멍청하구나. 나는 신오 교무 똑똑한 줄 알았는데 그것도 모르고 멍청하네”라고 한다. 당황해서 일단 웃으면서 “그러게요. 제가 멍청하네요” 하고 넘겼지만, 속에서는 화가 올라온다. 분명 같은 사람을 보고 있는데, ‘멍청하네’라는 말 한마디로 방금 전까지 고요하던 마음에서 왜 이렇게 온갖 시비가 일어나며 화가 올라와서는 사람이 미워 보이는 것일까?

하루 종일 눈을 사용한다. 분명 같은 눈을 사용하고 같은 것을 보는데, 어느 때는 좋고, 어느 때는 싫다고 분별한다. 눈을 사용하는 동안 열반에 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떻게 하면 열반에 들 수 있을까?

정산종사는 『세전』 제9장 ‘열반’에서 열반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열반이라 함은 우리 말로는 두렷하고 고요하다는 뜻인바, 두렷하다 함은 우리의 자성이 원래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자리임을 이름이요, 고요하다 함은 우리의 자성이 본래 요란하지 아니하고 번뇌가 공한 자리임을 이름이요.’

낯이 많이 익다. <정신수양>의 ‘정신’이다. 정신은 마음이 두렷하고 고요해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경지를 이름이다. 눈을 사용할 때 온전한 정신을 여의지 않으면, 눈을 사용할 때 마음이 청정하고 고요하면, 그때가 살아서 눈을 사용하면서 얻는 열반이다. 무분별의 불생불멸한 자리에서 분별의 진리인 인과보응의 이치를 그대로 드러내는 열반은 그래서 일원상이다.

그런데 공부인이 눈을 사용할 때 일원상을 사용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한 쪽에 치우치기 때문이다. 눈 감으면 눈 감은 데 치우치고, 눈 뜨면 눈 뜬 데 치우친다. 벌레 사진에 치우치고, 멍청하다는 소리에 치우친다. 이렇게 치우치면 가려져서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바른 취사를 하지 못하기 쉽다. 성불의 인(因)을 심을 공부기회를 놓치고, 그동안 길들인 중생의 마음을 습관적으로 쓰게 된다.

눈 떴을 때와 눈 감았을 때를 한결같이 하는 연습을 해보자. 불생불별의 자리에서 인과보응을 드러내고, 인과보응이 드러날 때 그 바탕이 되는 불생불별을 여의지 않기를 잊지 말고, 때때로 그렇게 오래오래 해보자.

/미주선학대학원대학교

[2021년 7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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