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오 교무
강신오 교무

[원불교신문=강신오 교무] 몇 해 전, 꾼 꿈이다. 누군가에게 쫓겨 숨어다니며 가까스로 총부에 도착했다. 대종사 열반하시고 옛 조실에 누워계시는데, 가슴이 아파 가슴을 치며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한 선진이 대종사께서 주는 물건이라며 손수건으로 싼 물건을 손에 쥐여주었다. 조심스레 열어보니 도장이다. 바닥에는 ‘지선(至善)’이라고 쓰여있다. 소중하게 품고 잠에서 깨었다. 교전을 열어 뜻을 살피니, 성리품 3장에 ‘선과 악을 초월한 자리’를 지선이라 한다는 법문이 있다. 마음에 환히 들어오지 않아 화두로만 간직하고 있던 것을 때가 되었는지 교당 교무님이 『정산종사 법설』의 ‘휴휴암좌선문’ 해설을 한 번 보라고 권하여 읽어보니 거기 ‘지선’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지선이란 끝까지 대자대비(大慈大悲)심을 놓지 않음이요, 또한 선(善)이라는 착(着)에도 사로 잡히지 않고 오직 천지가 응용무념으로 만물에 덕화를 입히듯이 불변의 심경으로 매사를 시종여일하게 하는 것이니라.”

대자대비란 무엇인가. 불지품 3장에 이르기를, ‘대자’는 선량한 이가 사은에 보은하고 삼대력을 길러 무루의 공덕을 지으면 크게 기뻐하고 사랑하며 더욱 선도로 인도하는 마음이요, ‘대비’는 탐진치에 끌린 중생이 스스로를 망치며 스스로 악도에 떨어질 일을 지어 그 죄를 그대로 받으면서도 사은을 원망하는 것을 보고 크게 슬퍼하고 불쌍히 여겨 천만 방편으로 제도하는 마음을 말한다.

한없이 너그럽기만 한 것을 대자대비라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쉬울 수도 있다. 세상사람이 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지, 누가 나쁜 사람이 되고 싶겠는가. 당장 나부터도 원만한 공부인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모난 사람이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 그러나 대자대비는 악도에 떨어진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선도 초월하고 악도 초월해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 천만방편을 써서 제도하려는 마음까지를 말한다. 원근친소와 시비이해 속에서 깨끗하고 고요한 마음을 여의지 않고 육근을 사용함이다. 나 없음으로 큰 나를 드러냄이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지선’이라는 글씨를 왜 굳이 도장을 파서 주셨을까. 일원은 법신불이니 제불제성의 심인이라고 했다. 제불제성의 마음도장을 일원이라고 한 것은, 그 마음이 불생불멸을 떠나지 않고 인과보응을 작용하고, 인과보응을 통해 불생불멸을 드러냄으로써 그대로가 일원상이기 때문이다. 제불제성은 그 마음작용이 일원의 도장과 같아 ‘나’라는 것이 꾸며내는 탐진치에 속아 흐트러지지 않는다. 일원상으로 한결같다. 마음 작용이 환히 보이기에 스스로를 기만하거나 상대를 속이거나 하지 않는다. 인간이 이렇게 마음을 쓸 때 제불제성이라고 하는 것이니, 매 순간 일원상으로 살라는 말씀이 아닐까. 아직은 모양이 맞아 떨어지지 않아도 일원상의 표준을 받았으니 하고 하고 또 할 뿐이다.

/미주선학대학원대학교

[2021년 8월 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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