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심 교무
이성심 교무

[원불교신문=이성심 교무] 국운과 교운은 함께한다는 말씀을 스승님들께 많이 받들었다. 공자는 환란이 있은 후에야 공부의 참된 힘을 얻을 것이라고 했다. 석가세존도 전생에 가리왕에게 팔다리를 잘리는 환란을 당했어도 하늘을 원망하거나 사람을 탓하지 않고 큰 원력으로 부처님이 되어 대자비를 전 인류에게 전했다. 성인들의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적공 보따리요 평상심으로 갈고 닦은 여래행이라 본다. 대산종사는 여래를 부지런 딴딴이라 칭했다.

8월 12일 임시 수위단회에서 ‘수위단원 총사퇴’ 등의 안건을 의결한 후 종법사님 말씀이 있었다. “저희가 수위단을 해도 교단에 살고, 아니어도 교단에 산다. 우리들이 하는 일은 여기 있으나 저기 있으나 그 일, 교단 일을 하는 것이다. 제가 영산선학대로 인사이동 갈 때 예타원 종사께서 총부 정문에서 ‘우리가 여래 되자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공부한다’는 그 말씀을 해 주셨다. 지금까지도 제 가슴속에 남아 있다. 수위단원들이 여기 와서 하려는 일도 대종사님 법 받들고 공부해서 여래의 실력 갖추자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모두 여래 되시기를 심축한다.” 우리들의 삶은 교단 내 어느 자리, 어느 위치에 있지 않고 그 일 그 일을 하는 자세와 마음공부에 있음을 전해 주신 것이다.

수위단원 6년 임기 중 3년으로 마무리한 단원들에게 종법사는 ‘여래 되는 공부’를 강조했다. 여래는 진리체현자로 부처님과 같은 인격을 가진 사람이다. 『대종경』 불지품 7장에서 대종사는 진묵대사의 행동에 대해 ‘술 경계에 술이 없었고 색 경계에 색이 없으신 여래’ 즉 경계가 없으신 분이다고 했다. 제자는 대종사의 말씀을 받들기 전까지는 괴로웠다. 자기의 시각으로 진묵대사를 시비이해로 분별하고 분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의 모습이 그 제자와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교단 혁신을 요구하는 의견을 피력하면서 왜 종교가에서 입에 올리기도 껄끄러운 주제가 교역자 광장에 게시가 되고 급기야는 개개인의 흑역사 혹은 과거사 발언까지도 서슴치 않고 그 사람 현재의 모습으로 귀결시키고 있는지 아이러니하다. 심지어 한 사람 한 사람을 희롱하는 문화가 싹트고 있다. 언제까지 이러한 정서가 진행될지 두렵다. 자칫 이 시대 우리들의 자화상으로 기록될까 우려된다.

교역자광장의 게시글을 쓰고 읽는 사람은 성직자인 교무이다. 적어도 성직자라면 직무상 알게 된 정보나 사실을 옮기지 않아야 한다. 또 해야 할 말과 아니 할 말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사회의 여·야 정치나 이웃종교에서의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볼 때는 ‘꼭 저래야 하냐’고 얼굴 찡그리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타인의 모습은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으면서 왜 교단 혁신을 피력하는 자리에서 객관성을 잃고 도를 넘는 말과 글로 상처를 줘야만 하는가.

이제 곧 수위단원 보궐선거가 시행된다. 평상심의 여래 공부로 임했으면 한다. 우리 모두가 ‘여래 되는 공부’에서 중요한 것은 ‘그 일 그 일’이다.

전무출신의 도에서도 그 일을 강조했다. ‘각자의 맡은 바 직장에서 그 일 그 일에 힘과 마음을 다하면 곧 천지행을 함이 되느니라.’ 천지행으로 임하다가 실수를 했을 때도 역시 그 일만을 갖고 시비를 논해야 한다. 그 일을 실마리 삼아 일파만파로 문제를 키우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취사라 본다. 한 법학자의 책 『왜 나는 법을 공부하는가』에서 ‘공부란 자신을 아는 길, 자신의 속을 깊이 들여다보며 무엇에 들뜨고 무엇에 끌리는지, 무엇에 분노하는지 아는 것이 공부의 시작이다’고 했다.

국운과 교운 사이, 우리는 성숙한 종교인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환란의 기운을 평정할 적공보따리를 더욱 챙기며 모두가 여래행을 나투는 진급의 길을 내어보자.

/둔산교당

[2021년 8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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