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일 교무
김경일 교무

[원불교신문=김경일 교무] 신(信) 다음은 분(忿)이다. 분심(忿心)은 용장(勇壯)한 전진심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어떤 일을 당하여 두렵거나 무서워하지 않고 씩씩하게 앞으로 전진하는 높은 기상의 마음이다. 이 분심이 있으면 없던 힘도 생겨나서 하고자 하는 일을 촉진시켜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어떤 일에 믿음이 생겨 하고자 하는 의욕을 냈다가도 이런 저런 유혹에 마음을 뺏기거나 나태해 지는 것이 보통 중생의 모습인데 이럴 때 분심을 일어내어 용기 있게 한 걸음 떨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대종사는 이 분심을 만사를 이루고자 할때에 권면하고 촉진하는 원동력이라고 말씀했다. 

서가모니는 히말라야 설산에서 고행했으나 그 의심을 풀지 못하고 탈진해 갠지스강가에 쓰러졌지만 한 잔의 우유를 얻어 마시고는 다시 근처에 보리수 나무 아래 좌정하고 ‘이 의심을 풀지 못하면 결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한 것이 분심의 대표적 예다. 공자도 ‘아침에 도(道)를 들을 수 있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한 결기의 마음으로 위편삼절(韋編三絶)했다고 하지 않는가. 

한 번 정당한 일에 발심하여 나섰으면 죽기를 각오하고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가는 것이 분심이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고 부처와 중생의 종자가 따로 있는가? 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치켜떠서 정진해야 한다. 기왕에 대도에 발심하여 신앙과 수행에 입문했다면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 출가한 사람들은 본분사를 방해하는 조건이 있으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결기로서 용단해야 한다. 재가(在家)중에서도 거진출진(居塵出塵)하기를 결심했다면 나이 오십 중반에는 가정사를 대강 마무리하고 자기 생활을 수행자의 조건으로 용기 있게 결단해야 한다. 

그러나 간혹 객분(客忿)과 정분(正忿)을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자주 보게 된다. 객분은 부당한 일을 당해 분노하는 마음이다. 불의를 당해 분노가 일어나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으나 감정적이고 일시적이고 훗날의 대책이 없는 무모한 혈기의 용기라면 생각해 볼 일이다. 또는 상대심으로 시샘하거나 질투하는 마음일 수도 있다. 

또는 주변의 사소한 잘못을 빌미로 한때의 자기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분노하는 것은 다 객분이다. 객분(客忿)이란 단어에서 손님 객(客)자를 쓴 것이 의미가 있어 보인다. 이러한 분심은 마치 지나가는 손님처럼 일시적인 것이어서 일사의 성취나 수행 정진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뜻 같다. 정당한 분심이란 정당한 일에 대해 굳은 결심을 가지고 끝까지 간절하게 밀고 나가는 용기 있고 씩씩한 마음 자세다. 그런 마음은 침착한 가운데 발현되는 이성의 용기다. 또 서원에 바탕해 자신의 나태와 방심을 나무라는 자책의 마음이다. 

선진 중에 젊은 나이에 큰 공부를 성취하고 요절하신 분이 주산 송도성 종사다. 주산종사는 『성가』 129장 시문 가사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오! 사은이시여!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열정을 주십시오. 사은께서 그 힘만 주신다면 분연히 일어나서 두 팔을 부르걷고 일터로 달음질 하겠나이다. 두 눈을 바로 뜨고 거리로 뛰어들겠나이다. 이 한 몸을 다 바쳐서 차가운 사회로 뛰어들겠나이다.’ 이 성가를 부를 때면 나도 모르게 주먹이 꼭 쥐어지던 기억이 난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사소한 일상에 목숨 걸 일 있는가. 분연히 일어나서 자기 본분사에 용기 있게 나설 때다.

 /원불교대학원대학교

[2021년 9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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