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일 교무
김경일 교무

[원불교신문=김경일 교무] 진행 4조의 세 번째는 의(疑)다. 의(疑)란 의문(疑問)을 일으키는 것이다. 『정전』에서는 ‘일과 이치에 모르는 것을 발견하여 알고자 함’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래서 ‘만사를 이루고자 할 때 모르는 것을 알아내는 원동력’이라고 한 것이다. 

모르는 일이나 이치를 당해서 이게 뭐지? 왜 이런 거야? 하고 의문이 나지 아니하면 그 진실에 다가설 수 없다. 그래서 사리간 지혜공부를 위해서는 왜? 라는 질문이 매우 중요하다. 철학에서도 회의(懷疑), 의심을 품는 것이 공부의 시작이라고 한다.

어릴 적 대종사의 일화는 의문의 연속이다. 교사(敎史)의 기록을 대강 발췌해보면 이렇다. 7세 되던 어느 날 하늘을 보시다가 맑은 하늘에서 문득 바람이 일고 구름이 일어나니 그 바람과 구름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의심했다. 9세 되던 어느 날부터는 나는 누구인가? 의심이 일기 시작해 부모 형제의 관계를 비롯하여 만나는 일과 물건은 물론 주야변천의 자연 현상에 대해 모든 것이 의심이 돼 어린 대종사의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이것이 이른바 대종사 십상(十相)중에 첫 번째 관천기의상(觀天起疑相), 하늘을 보고 의문을 일으킨 모습이다. 

여기서부터 쉼 없는 의문과 사색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우주의 본원과 인간의 본성이치를 깨닫게 되는 대각(大覺)이 있게 된 것이다. 일상의 생활인을 포함해서 모름지기 수행자는 의문이 없으면 공부의 진전이 없다고 봐야 한다. 

수행자가 참구하는 의두가 없으면 깨달음도 없다고 봐야 한다. 모름지기 안으로 의문을 품고 밖으로는 물어야 한다. 어린 학생들도 선생님과 격이 없어서 질문을 많이 하는 학생일수록 공부도 잘하는 것처럼 도가에서도 안으로 질문을 품고 연마하면서 기연을 따라서 스승과 도반에게 스스럼없이 문답할 수 있어야 한다.

공자는 아랫사람에게조차 묻는데 부끄럼이 없고 주저함이 없었다고 하는데 이야말로 만대 공부인의 표준이다. 여기서 살짝 헷갈리는 것이 있을 수 있다. 신(信)과의 충돌 가능성이다. 정당한 스승과 법에 대해서 불신(不信)하는 것과 의문을 일으키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예를 들면 『대종경』을 공부할 때 어떤 구절에 대하여 내 생각과 다를 때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하고 의두 삼아 궁구(窮究)하는 것은 정당한 의심이다. 하지만 ‘이 말씀은 틀렸어!’라고 단정하고 불신하는 것은 불연을 끊는 극히 위험한 태도다. 

정당한 의심은 신심과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원과 신심이 깊어야 의심도 깊어져서 큰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그릇된 의심이란 자신의 주견을 가지고 진리와 법과 스승을 함부로 재단해 불신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이런 의심을 호의불신(狐疑不信)이라고 했다. 여우는 매우 영리한 짐승이지만 의심이 많다고 해서 만들어진 사자성어다.

이와 함께 회자되는 사량계교(思量計較)라는 말도 있다. 자기 주견과 고집을 놓지 못하고 자기 생각으로만 헤아려 끊임없이 셈하고 비교한다는 말이다. 결국 호의불신과 그 뜻이 크게 다르지 않다. 중근은 진리와 법에 확실하게 알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니어서 자칫 주견과 고집에 빠지게 될 위험한 때다. 누구나 공부하는 중에 대개는 이 위험한 터널을 지나간다고 봐야 한다. 중근을 알지 못하고 고집하면 그 끝이 비참하다고 했다. 정당한 의문을 품고 사색하고 궁구하고 문답하는 공부가 의(疑)공부의 요지다.

/원불교대학원대학교

[2021년 9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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