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일 교무
김경일 교무

[원불교신문=김경일 교무] 사연(捨捐) 4조는 불신(不信), 탐욕(貪慾), 나(懶), 우(愚) 네 가지 조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연이라는 말은 버릴 사(捨), 버릴 연(捐)자의 합성어다. 공부나 일에 있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마땅히 버려야 하는 조건들이라는 점에서 사연사조라고 이름한 것으로 보인다. 

그중에 첫 번째가 불신인데 이미 앞서 다룬 진행 사조 신(信)의 반대되는 조건이므로 따로 더 더해서 설명할 것이 없을 것 같아 생략하는 점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그다음은 탐욕이다. 탐욕은 ‘상도(常道)를 벗어나서 과히 취하는 것’을 이른다. 

욕망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욕망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살고자 하는 욕망이 없으면 존재할 수가 없다. 식욕, 성욕, 재물욕, 명예욕 등의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는 원초적 욕구들이다. 그러나 절제되지 않은 채 남보다 더 많은 재물을 쌓고자 하고, 더 화려한 처자권속을 거느리고자 하며, 더 큰 지배와 높은 명예를 누리고자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은 다 탐욕의 산물들이다. 

인간이 이룩한 모든 문명은 다 이런 욕망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나만의 욕망을 무한대로 추구해서는 결코 욕망이 취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역사 경험을 통해 알게 되면서 어떻게 하면 함께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한 것이 이른바 문명세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의 인생을 포함해서 국가나 세계가 어떻게 하면 일방적 욕망을 절제하고 함께 공동 번영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 이른바 ‘인류공동체’다. 그래야 우리 생명을 보존할 수 있고 평화를 담보해 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은 근본적으로 부정해서는 안 되지만 또 한편으로 절제되지 않으면 욕망을 성취할 수 없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당한 욕망은 나를 성취로 이끌지만 과한 탐욕은 나를 타락으로 이끈다. 

『대종경』에 실려 있는 일화다. 영광에 한 부자가 살았는데 어느 해에 심한 가뭄이 들어 지역 사람들이 끼니를 걱정하게 되었다. 이 부자는 착한 마음을 내어 전곡을 동네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자 모두 다 입을 모아 그의 선행을 칭송하였다. 다행히 그 이듬해 풍년이 들어 동네 사람들이 여유가 생기자 서로 의논을 해서 그 부자의 선행을 기록한 조그만 공덕비를 세워 주었다. 그런데 이 부자는 이 작은 공덕비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이 돈을 새로 내어 새로 크고 근사한 공덕비를 세웠다. 동네 사람들이 그의 과욕을 뒤에서 수군대며 그 부자의 처신을 비난하였다고 전해진다. 탐욕은 모든 타락의 시작점이다. 과한 욕심, 여기서부터 모든 죄가 일어나고 고(苦)가 생기는 것이다. 

사욕(私慾)을 벗어나서 도(道)를 이루고자 하는 욕심을 서원(誓願)이라고 한다. ‘기필코 불도를 다 배우고 익혀 마침내 부처를 이루고 일체중생을 제도하리라’하는 서원은 어떤 욕심보다 크고 높지만 이런 욕심을 탐욕이라고 말하진 않는다. 왜 우리는 쉽게 탐욕의 유혹에 빠지는 것일까? 미루어 생각해 보건데 큰 나를 알지 못하고 작은 나에 집착 때문이다. 

대욕(大欲)은 무욕(無欲)이라는 말이 있다. 정말 큰 욕심은 나를 내려놓는 데서부터 온다. 또는 속히 이루고자 하는 조급한 마음에서 탐욕에 빠지게 되기도 한다. 급하게 이루고 빨리 성취하고자 하는 욕속심으로는 큰 성취가 어렵다. 

/원불교대학원대학교

[2021년 10월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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