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오 교무
강신오 교무

[원불교신문=강신오 교무] 미주선대 기숙사에는 식당일을 해 주는 어머니가 있다. 교회 권사인 어머니는 아는 분을 도와주다가 우리와 인연이 돼 15년이 넘도록 매일 저녁, 따뜻한 식사를 만들어주고 있다. 하루는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모두 손을 모으고 짧게 기도하고 식사를 시작하는데, 식당 어머니가 기도를 했다. 이 음식을 주심에 감사한 것을 시작으로 미주선대 식구들이 무탈하게 한 자리에 모여 식사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염원하는 기도까지 길고도 간절한 기도였다.

식당 어머니의 기도를 들으며 문득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어디에 기도를 하는 것일까. 혹시  마음속으로 어떤 절대적인 신을 그리며 이름만 법신불 사은을 부르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법신불 사은이시여!’ 하고 부를 때 그것은 어떤 인격적인 신을 대체한 이름이 아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부르는 법신불 사은은 일원상을 말한다. 마음이 두렷하고 고요하여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경지이다. 대종사는 불생불멸의 도와 인과보응의 이치가 서로 바탕해 한 두렷한 기틀을 지은 것을 이름해 일원상이라고 했다.

뭔가 보이고 만질 수 있는 대상을 믿거나, 보이지 않더라도 언어와 이름, 혹은 형상으로 상상할 수 있는 대상을 믿는 것은 쉽다. 인간이 가진 육근의 한계 안에서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측할 수 있으면 불안이 줄어든다. 그에 반해, 불생불멸의 도와 인과보응의 이치를 신앙하는 것은 막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일원-법신불-사은을 알고 보면, 이보다 더 사실적이고 진리적인 신앙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원상, 즉 불생불멸한 도와 인과보응의 이치는 일체생령이 가지고 있고, 누구에게나 적용이 되며, 누구나 늘 체험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청정하고 고요하면 그 순간에는 크고 작고, 있고 없고, 예쁘고 밉고, 좋고 나쁘고, 가고 오는 것이 없다. 그 자리에서는 모든 분별과 주착이 없다. 나고 죽는 것이 없기에 불생불멸이다. 그런데 경계를 따라 크고 작고, 예쁘고 밉고, 좋고 나쁘고, 있고 없고, 가고 오는 것이 생긴다. 이렇게 생멸하는 것은 인과보응의 이치를 따른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으므로 이것이 없는 연기는 불생불멸을 바탕으로 돌아간다. 불생불멸이 바탕이 되므로 인연과가 호리도 틀림없이 운행되고, 불생불멸은 인연과를 통해 드러난다.

‘법신불 사은이시여!’하고 부를 때, 우리는 그 순간 모든 분별과 주착을 여의고 일원과 합일한다. 그 순간이 일원의 위력을 얻고 일원에 체성에 합일하는 순간이다. 부딪히는 수많은 순경과 역경 가운데 일원상을 여의지 않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법신불 사은이시여!”하고 불러보자.

/미주선학대학원대학교

[2021년 11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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