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천 원로교무
김종천 원로교무

[원불교신문=김종천 원로교무] 먼저 이 이야기는 『마하트마 간디: 마지막 국면』을 근거로 인도에서 1956년에 두 권으로 발행한 것 중, 1권의 23장 ‘브라마차리야’를 참고했다. 저자인 뺘레랄은 간디의 개인비서로 오랫동안 일한 사람이다. 필자는 그런 책이 있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는데, 미국 콜로라도 주립대학 도서관에서 발견하고는, 가슴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있다. 저자의 용기에 새삼 감사드리고, “미래의 역사학자들은 이 시대를 원자탄의 시대가 아닌 간디의 시대로 생각할 것이다”라는 간디에 대한 평 또한 떠오른다.

간디는 4명의 아이가 있었는데 넷째를 난후 제자들에게 금욕을 가르쳤다. 그리고 70이 된 나이에 소녀와 동침했다. 그러니 그 측근들로서는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린다는 것은 자기들 얼굴에 똥칠하는 일이었고 또 간디 자신으로서도 ‘마하트마’라는 신성(神性)을 잃어버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불행이었는지 아니면 다행이었는지 간디의 개인비서였던 뺘레랄이 어떤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지적인 청년이었고 글재주가 남달랐다. 간디는 그에게 최후의 통첩장을 보냈다. “독신을 지키든가 아니면 아쉬람을 나가라. 아니면 네가 결혼을 한다면 막지는 않겠지만 금욕을 해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주문이었다. 이성에게 매료된 젊은 남성에게 결혼하되 금욕을 하라니. 자기가 먹으려는 밥상 위의 요리에서 향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데 배고프고 원기 왕성한 청년보고 그것을 먹지 말라니.

이런 간디의 태도에 그는 표현은 안했지만 심기가 뒤틀렸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간디에 관한 그 책에, 앞에서 언급한 대로 30여 쪽의 글을 써서 세상에 공개해 버렸다. 지금도 간디 추종자들은 그것에 대한 함구무언이다. 하기야 어느 나라에서도 비슷하지만, 인도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종교 이야기는 피한다. 특히 힌두교와 이슬람을 비교분석 규정한다거나, 카스트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금물 중의 금물이다. 그들은 한국인과는 달리 정치 이야기를 즐기지 않는다. 특히 간디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신상에 좋다. 인도인들은 간디를 두고 절대로 부정적인 표현을 안 한다. 그것은 간디가 신과 같은 수준으로 숭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살아있는 사람은 결코 숭배를 안 하지만 인도인은 그 반대다.

간디의 최측근 제자들이었던 비노바 바베와 카카 카렐카 등이 뺘레랄에게 ‘다른 것은 네 마음대로 해도 좋은데 그 부분만은 삭제하라’는 요구를 했지만, 결국 그 이야기는 세상에 공개됐다. 간디 자신의 이야기에 의하면 나이 70에 성적인 꿈을 꾸었다고 한다. 낮에는 나를 컨트롤 할 수 있었지만 밤에는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통찰이 맞다. 사람의 의지력이 작동하는 낮시간은 가짜고 그의 꿈에서는 어쩔 수 없는 진정한 자아가 비시시 일어난다는 것이다. 

간디는 인생의 막바지에 가서야 평생의 훈련이 아무 소용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죽기 전 2년 동안 탄트라실험을 했다. 이 내용을 간디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안 알렸다. 그들은 그러는 2년 동안 굉장히 불안해했고 그 실험들의 중단을 종용했다. 그것은 간디가 쌓아온 평생의 위신에 먹칠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디는 참으로 용감한 사람이었다. 어쨌든 그는 진실한 인간이었다. 그는 전통적인 방법에 따라 훈련한 자기의 노력이 수포가 됐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중앙남자원로수양원

[2021년 12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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